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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열사는 청주 석교동에서 태어나 석교초와 대성중, 청주고를 졸업하고 1977년 3월 부산대 공대 기계과에 입학했다. 1978년 간디사상연구회 써클 활동을 시작으로 1979년 10월 부산대 시위와 부산민주항쟁에 참가했다. 같은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전국의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져 고향인 청주로 귀향했다. 이어 1980년 2월 청주제일교회 청년들과 청주시내 대학 학원자율화추진위 활동에 참여했고 그해 5월 7일부터 충북대 5월 민주 시위에 참여했다. 그해 5월 18일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돼 청주 보안대에 구속돼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당시 충북대생도 아닌데 앞장섰다는 이유로 더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고 알려졌다. 최 열사는 그해 8월 대전 3관구 계엄사령부로 이송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11월 5·18국가반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며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됐다. 이어진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됐고 이듬해 6월 20일 석가탄신일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고문과 감옥 생활의 후유증 치료를 위해 서울의 친척 집에서 요양 중 1981년 9월 1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을 거뒀다. 최 열사의 사망 후 1984년 추모 3주기를 맞아 추모비 건립이 논의됐고 1984년 11월 4일 청주 용박골 제일교회묘역에 추모비가 세워지고 해마다 추모 행사가 거행됐다. 1999년 5월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로서 국가유공자로 추서됐고 2000년 용박골 추모비역의 흙을 국립 5·18묘역으로 이장했다. 추모비는 청주 남이면 양촌리 선영으로 옮겨졌다. 출처 : 굿모닝충청(http://www.goodmorningc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