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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장, 피 묻은 솜옷, 한줌 재 이회영의 최후. 망명을 떠난 순간부터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제국주의 왜적에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아나키스트 행동조직을 지속적으로 지도.운영해오던 혁명가 이회영. 그는 노구를 이끌고 중국인들과 항일공동전선 형성, 지하조직망 구축을 위해 비밀리에 배(영국 배 남창호 밑바닥 4등선실)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視死如歸(이사여귀)!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 이회영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운명을 이렇게 말했다. 아들 규창이 황푸강 와이탄부두에서 선송하면서 본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렌항에서 다렌수상서 경찰에 붙잡힌 그는 곧 뤼순감옥으로 끌려갔다. 소식을 접한 동지들은 이회영을 구출코자 하였으나 손쓸 겨를리 없었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이회영은 세상을 떠났다. 유품은 솜을 부닌 따파오, 모자, 해진 신발 한켤레가 전부였다. 예순다섯이었다. 1932년 11월 17일, 을사늑양을 강요당한 날과 날짜가 같았다. 돌지들의 연락을 받은 딸 규숙이 이를 서울에 있는 어머니 이은숙에게 전보로 알렸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화장된 유해는 한 줌 재가되어 1932년 11월 28일 경기도 장단 큰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