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page


184page

추모 흉상 건립에 대한 전기. 이제 흉상 건립 제막을 보게 된 애국지사 고 김용창님은 1926년 8월 3일 화성군 향남면 상두리에서 김언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남보통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였고 상급학교를 가려하였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학비 조달이 어려운 형편이어서 부득기 1941년 10월 어린 나이로 고학의 길을 택하여 서울에 올라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을 거쳐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용원등으로 근무하면서 경성덕수공립상업학교 야간반에 입학하여 공부에 열중하였는데 당시 근무하고 있던 보험관리소의 대우가 조선인과 일본인사이에 차별이 너무 심한데 불만을 품게되었고 이와같흔 시기에 조선역사에 관계되는 서적을 탐독하게되자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1944년 4월 중순경 학우들에게 조선감독인 소?의 조선인 차별정책을 비난하였고 그 후부터 각계 동료들에게 미국 러시아 상해등지에서 조선인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고있다. 조선이 독립하면 나는 일본인을 모조리쫓아버릴것이다. 이번 전쟁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한다 하더라도 조선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고 오히려 패하여야 조선민족에게 행복이 올것이라 생각한다 라고 선동하였으며 동년 5월 초순 근무하고 있는 보험관리소 건물벽에 조선반도 2600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이 독립의 때는왔다. 이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여 조선청년을 말살한다 참으로 가련하도다 라고 써서 벽에 붙이고 동지들이여 조선독립을 찾자며 조선서적을 읽어보아라 우리는 조선인이다 등 선동하던중 그 악명높은 경성고등검찰 사찰형사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및 일본천황모독죄로 1944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의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무중 심한 고문등 비인도적인 마수에 걸려 1945년 4월 3일 광복을 불과 4개월여 앞두고 20세 청춘으로 목숨을 바치고 숨진 애국지사임을 알려드리며 유족으로는 친제 용무가 향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전기는 정부 보존 항일독립운동사료집에서 발체한것입니다. 이와 같흔 휼융한 분의 숭고한 얼을 되새겨 애국애족의 민족혼이 천추만대의 영원히 승화되기를 바라며 추모흉상을 제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