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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일. 고읍면에서 고읍,강상,강하,양서 4개면민 4,000명이 운집한 대규모 연합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윤기영,이보원,신우균등이 다시 참가하여 군중들을 이끌고 헌병주재소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연창했다. 시위군중들이 양평읍내를 향해 행진하던중 일본 헌병대와 마주쳐 최대현은 체포되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3월23일. 용두리 장날을 기해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날 시위는 단월면 덕수리의 산재원과 부안리의 김종학이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과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를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조선독립기'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했다. 시위행진이 계속되자 일본헌병이 출동하여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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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0일. 광탄리에서 진행된 만세시위는 마룡리의 조용호,오촌면의 김윤구,신순근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조용호는 태극기를 높이들고 '지금 우리는 일본과 쌍란속에 들어있다. 이제 떄가 되었으니 응당 두가지로 갈라져야 하지않겠느냐'고 외치자 수백명의 군중이 만세행진에 나섰다. 시위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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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일/4월11일. 지제면 곡수리에서 3,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시위가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피살되었다. 4월11일에도 지제면 곡수장터에서 시위군중 3,000여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여주군 개군면에 속했던 김영규,이철영,이호승,곽수영등의 사전준비에 의해 진행되었다. 시위군중이 행진하던 도중 기마헌병대의 총격을 받아 김영규가 그자리에서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이후 헌병대가 마을을 수색하면서 이호승이 총격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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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7일. 석곡리일대에서 3,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전석현이 돌지를 규합하여 격문을 작성하고 이종성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위치자 장날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들이 양평을 향해 행진하던중 양평기마헌병대 수십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