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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197 송산 지역의 산증인 홍사웅 선생님은 독립운동가 홍열후 선생님의 손자로 올해 92세이다. 송산의 변화를 기억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현재는 포도 농사를 지으며 한적하게 지내고 계신다. 직접 기른 포도를 한아름 내어주며 많이 들으라고 손짓하셨다. 일제강점기에 송산면에서 태어나 6.25 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억들을 선명히 간직하고 계셨다. 홍사웅 선생님을 통해 송산 지역의 과거 부분 부분을 빌려올 수 있었다. 홍사웅 독립을 외친 삼형제 형제인 홍남후, 홍열후, 홍관후 선생님은 1919년 3월 28일 사강장날에 열린 만세운동 선두에 섰다. 당시 사강장은 오일장이었는데 서신, 마도, 남양, 비봉에서도 찾아올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시장 구석구석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가득했던 유명한 장이었다. “대부도에서도 여기 사강장으로 왔어요. 그 때는 소 같은 것도 배로 실어 와서 여기서 팔았어요. 그날에도 장이 섰고 사람들은 만세운동을 시작했다고 해요. 일본 순사가 와서 말리다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홍면옥 선생님한테 총을 쐈는데 홍면옥 선생님 어깨를 관통했어요. 그걸 보고 결국 관중이 일어난 거예요.” 만세운동이 끝나고 일본군이 마을을 찾아와 집집마다 불을 놨다. 조금말, 정도리, 육도리 외에도 많은 동네의 가옥이 잿더미가 되었다. 다행히 홍사웅 선생님 댁은 화를 면했다. 홍사웅 선생님은 한순간에 모두 거지가 되었다며 쓴웃음을 지어보이셨다. 삼형제분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가자, 홍사웅 선생님의 아버지는 홀로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내가 탄생하기 전에는 우리 집이 상당히 컸대요. 그런데 할아버지 삼형제가 전부 서대문 감옥에 들어가 계시니까 집안이 크게 흔들렸어요. 1919년, 기미년에 내 선친이 21살이 셨죠. 우리 선친이 혼자서 애 많이 썼어요. 서대문 감옥이 참 멀었는데 가서 사식 넣어 드리고…. 그나마 우리가 살기에 넉넉해서 일본인 변호사 수임료를 냈어요.” 가족들의 노력으로 독립운동가 홍열후 선생님은 9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홍남후, 홍관후 선생님은 7년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무렵 이미 재산은 탕진된 상태였고 집 은 안채 하나만 남았다. 행랑채나 창고가 있었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턱없이 작은 규모 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들이 돌아온 것만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감옥에서 나온 독립운동 가 형제분은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았다. 독립운동가 홍열후의 문장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