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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193 할아버지도 만세 운동에 참가했더란다. 주변 사람들은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는 통에 다행히 도피를 잘하셔서 큰일은 겪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렇다보니 특별하게 유공자로 지정되지는 않으셨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아오셨다고 말씀 하셨다.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옥고를 겪고 긴 시간이 지나 풀려나게 되니, 홍문선 선생님 또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세영 선생님도 그분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 까웠다고 하셨다. “먹고 살기는 무슨, 당시는 굶는 일이 다반사였어. 홍문선 선생님 그 양반도 몇 번 봤는 데, 큰댁이 그나마 살이가 괜찮아서 종종 밥 좀 얻어먹으러 오곤 했어요. 땅도 몇 없었 나봐. 이웃집 병아리 같은 것 죽잖아요. 그럼 그거라도 가져다가 구워서 먹고 그렇게 어렵게 살았어요.” 옥고로 긴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홍문선 선생님. 출소 뒤에도 마땅한 일거 리가 없어 매번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친척집을 쏘다녀야 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상황 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선포하고 누구 할 것 없이 공출로 재산을 빼앗겼다. 끼니를 때우라고 배급으로 나온 것은 콩깻묵이라, 알량한 양 으로 보름을 채워야하니 하루 밥 먹으면 하루는 굶어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때 일본놈들이 군대 가라고 꼬셔요. 해군 무슨 소년단 가라고. 돈 많이 벌어온다, 밥 준다. 말이 자원이지 애들 상대로 사기 치는 것 아냐. 그 사람들은 군대 가서 죽었는지 소식도 없어요. 송산에서 수원으로 비행장 만드는 데도 많이 끌려가고 그랬어.” 진세영 선생님의 친가, 갓난아기 시절, 현 집의 옛날 모습 국민학교 졸업사진, 일제시대 끝나지 않는 비극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이 찾아왔다. 마을 이곳저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곤 했 더란다. 그렇게 행복한 앞날만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이지만, 마을에 전운의 그 림자가 드리우며 비극이 시작되었다. 진세영 선생님은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고향인 송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 마을 사람 이 마을 한 쪽 귀퉁이를 가리키며 저쪽은 가지 말라 했더란다. 그 이유를 물으니 사람 을 죽인 곳이라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초였다. 사상이 다른 사람들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적지 않은 사람이 죽어나 갔다. 한때 독립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이들도 사상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 도망가거 나 잡혀가 죽곤 했다. 진세영 선생님의 장인어른, 홍문선 선생님의 형님 되시는 분도 지역 유지라는 명목으로 끌려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특히 송산중학교 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중학교 있는 자리에서 엉엉 소리가 나는 거야. 비명소리가. 입에다가 지푸라기를 넣어 서 때린 모양이지. 시체를 파보니까 입을 틀어막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더라고.”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 더러 참호를 파고 전투준비를 하라고 마을 사람들 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에 국군이 점령할 때는 혹시 인민군을 돕지 않았느냐 고초를 겪 기도 했고, 사강시장에 내린 폭격 때문에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진세영 선생님 은 그때의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씀하셨다. “장터에 폭탄이 펑하고 터지더라고. 뜨거운 열기가 확 오더라고. 매봉산 쪽으로 도망가 는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오는 거야.” 진세영, 홍영자 부부진세영 증명사진, 고등학생 시절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