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page

190 191 다사다난한 송산의 기억을 찾아서 ‘어서와요, 어서와.’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기록단을 맞이해주시는 진세영 선생님. 1932년생으로 벌써 90에 가까운 춘추이지만,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모습이었다. 송산에서 태어나 이웃집 딸 과 결혼한 선생님. 그의 사촌처제가 곧 홍문선의 손녀, 홍정희 선생님이다. 오랜 시간 역사의 뒤 안길에 있었던 홍문선 선생님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과정에서 진세영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을 수도, 나아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세영 선생님의 말씀에서 어떻게 홍문선 선생님이 다시 조명 받을 수 있었는지, 선생님이 기억하는 3.1 운동 이후 송산의 모습은 어땠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진세영 잃어버린 역사를 잇는 다리 홍문선 선생님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지도 4년이 되어간다. 송산 지역 독립유공자들은 연구를 통해 그간의 행적이 발굴되고 후손들에게 연락을 취해 그 공로를 인정받는 진전을 이루었다. 그 중 홍명선 선생님은 일찍이 90년도에 애국장에 추서되었음에도, 그 형제 인 홍문선 선생님은 먼저 보훈처로 찾아와 언급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기록을 찾아도 마 땅한 후손을 찾지 못해 곤란한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기록이 발굴되고, 후손들 연락해서 훈장받고 하는데 홍문선 선생님 이분은 마땅한 후손을 찾질 못하는 거야. 그러다가 나한테 연구했던 사람들이 찾아왔 더라고. 홍문선 선생님을 아느냐고. 내가 아는 건 전부 알려드렸는데, 생각해보니까 우리 처제가 그분 손녀더라고.” 다행히 연고자를 발견했지만, 홍정희 선생님과 다른 가족들은 연락이 원활하지 못했다 고 한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를 여읜 탓에 바삐 살아왔고, 스무 살 이 되던 해 바로 출가외인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진세영 선생님의 부인인 홍영자 선생님을 찾아뵈러 홍정희 선생님이 댁에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때 연 락처를 받아두었다고 한다. 이에 진세영 선생님은 당장에 연락처를 전했고, 홍문선 선 생님의 후손이 맞다는 소식과 함께 그분의 명예를 찾을 수 있었다. 홍정희 선생님은 연 신 고맙다고, 덕분에 평생의 한을 풀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고 진세영 선생님 역시 벅차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전화번호 받아놓질 않았으면 어쩔 뻔 했어. 천만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찾지도 못했을 거야.” 그렇게 홍문선 선생님은 2016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만세 운동 그 이후, 일제 강점기 송산의 기억 3대째 송산에서 살아온 진세영 선생님은 서훈 과정에 이어서,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송산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하게 말씀해주셨다. 송산 지역에서 사강은 특히 큰 시장 이 있어 사람이 많이들 모였노라고 운을 떼셨다. 인근에 바다와 염전이 있어 외부에서 물건을 들여오고 내보내기가 쉬워 화성의 경제적 중심지로 자리잡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만세운동 이후 거대한 파란이 찾아왔다. 장날에 시장을 찾아왔던 수많은 사람들 이 만세 운동에 참가하면서, 일제가 보복을 감행한 것이었다. 길가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 을 잡아가고, 마을에 불을 질러 순식간에 거처를 앗아갔다. 시위의 규모가 컸던 만큼, 일제 는 주요 감시 지역이라며 마을에 들어와 단속을 일삼았다. 여담으로, 진세영 선생님의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