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page

182 183 지금은 우리가 있다 송산 지역에는 조선 말기부터 의용소방대 4 가 있었다. 예종길 선생님은 32년 동안 의용소 방대 활동을 했다. 오롯이 고장을 위해 밤이고 낮이고 화재가 났다하면 뛰쳐나갔다. 명 예롭게 은퇴를 맞이하고, 현재는 의용소방대에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 보다 예종길 선생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용소방대에서 봉사하고 있다. “제가 11대 대장으로 10년을 했어요. 대원들에게 글자 그대로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 들이 되라고 가르쳤어요. 어떤 해에는 76건의 화재가 있었는데, 제가 거기에 다 갔어요. 한창 젊어서 돌아다닐 때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다 들었어요. 불만 나면 선두주자로 나 가서 화재 현장에 가니까, 미친놈이 아니면 저렇게 못한다고요.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우러나야 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아요.” 예종길 선생님은 가릴 것 없이 송산 지역의 봉사를 도맡아 하셨다. 현재는 송산지구3.1 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송산 지역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교육하고 알리는데 이바지 하고 계신다. 아내 분이나 아들, 며느리도 10년 이상 봉사를 하며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되고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신념만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 더 의미가 값지다. “송산지구3.1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지 12년 정도 됐어요.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서 후배들의 활동을 지지해주고 있어요. 저는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역사적 의식을 심어줘 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화성문화원이랑 같이 학생들 대상 교육 행사를 진행했어 요 . 짧은 시간에 아이들 마음에 와닿는 교육을 진행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더 많은 연구 와 시도가 필요하겠죠.” 4 소방서의 소방 업무를 보조하기 위하여 그 지역의 주민 가운데 희망자로 구성하는 소방대. 우리가 지켜야 할 조국(祖國) 예종길 선생님 아내분의 할아버지께서도 6.25 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라고 했다. 예종길 선생님은 젊어서부터 지역 곳곳을 돌며 오토바이 수리를 했지만 평생을 함께할 짝을 만 날 수 없었다. 송산에 정착한 뒤 운명처럼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결혼 후에야 아내의 할 아버지가 유공자임을 알게 되었다. 유공자 가족이기 때문에 매사에 행동을 조심해야 한 다고 호탕하게 말씀하셨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유공자시니까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했어요. 우리 아들도 그렇 고 , 손주들도 그래요. 늘 독립운동가 후손인 것을 남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저 묵묵히 독립운동가 후손의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 연결을 해나가야 해요. 어려서부터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이대로 자식들한테 가르치면서 늙어가는 거죠. 저희 안식구도 그 후손이라 핏줄이 있더라고요.” 형제분은 앞으로 국난이 온다면 선발대에 설 자신이 있다고 했다. 나라가 독립을 맞이 하고 지금까지 발전해 왔지만 언제든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며 대비를 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한다. “3.1 운동 하면 남들은 쉽게 생각하기도 해요. 저는 할아버지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3.1 운동을 무겁게 생각해요. 지금도 화재가 나면 옛날에 하던 습관 그대로 달려 나갈 거예 요 . 나라 정세가 흔들려서 저를 부른다면 당연히 가야죠. 가서 싸워야죠. 아버지도 총알 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 남으셨는데,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거죠.” 20년 전, 예종길 의용소방대 활동 당시, 예종길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