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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81 니고 있었다. 예종구 선생님이 남긴 붓글씨가 이곳저곳에 남아있고, 언제 발행되었는 지 모를 신문이 벽에 붙어있다. “3.1 운동이 터졌을 때 할아버지는 밤낮으로 태극기를 보급하셨어요. 어디서 정보를 들었 는지 일본군이 와서 우리 할아버지가 대부도로 대피를 하셨어요. 집에 와서 안계시니 까 불을 질러버린 거죠. 그래서 지금 아버님이 사시는 곳은 당시에 다른 동네로 터를 옮겨서 다시 지은 집이에요.” 불에 타 잿더미가 됐던 집은 현재 배추밭이 되었다. 놀랍게도 밭을 조금만 파보면 불에 탄 주춧돌이 보인다고 한다. 과거의 아픔과 시련은 땅 밑에 묻혔지만, 당시의 고통을 보여줄 흔적이 남아있었다. 형제분은 불에 탄 주춧돌이라도 보존하고 싶지만, 지금은 형제분의 소유가 아니라서 복원도 할 수 없다며 속상한 기색을 보이셨다. 독립운동가 예종구 아버지 예문탁 참 고달팠던 어린 시절 예종길 선생님은 오형제의 맏이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먹을 게 없어서 칡뿌리를 캐 먹거나, 풀을 뽑아 먹었다. 하지만 청정 음식을 먹어서 감기 한번 안 걸렸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쌀밥은 일 년에 딱 세 번만 먹었는데, 바로 구정, 추석, 할머니 생신이었다. 이 날은 오형제가 손꼽아 기다리는 행복한 날 이었다. “동생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독수리 오형제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동생을 업고 다마치기 3 하러 가고 그랬 어요.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었어요. 버스가 세 번 있었는데 아침 에 버스를 타려면 아주 전쟁이었죠. 그래서 걸어 다녔어요. 이게 추운 날, 비오는 날은 진짜 고역이에요. 지금처럼 우산이나 우비가 흔하지 않았잖아요. 길도 흙길이니까 질퍽질퍽하고. 그래도 어린 마음에 중학 교는 어떻게든 나와야 맞지 않나 싶어서 다녔어요.” 과거 송산 지역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때 마을은 꽤나 풍족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너른 바다에서는 어업을 했다. 형제분은 아버지와 굴을 따러 갔던 추억을 떠올렸다. 겨울에야 굴을 채취할 수 있기 때문에 손과 발이 시렸지만 잊지 못한다고 한다. “아버지 옆에서 보고 배운 거예요. 굴을 따서 까고, 따서 까고. 한번 시작하면 그렇게 정신없을 수가 없어 요 . 어르신들하고 막걸리 한 잔하면서 ‘아저씨,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어.’라고 하면 혼나고 그랬 죠 . 굴 따는 것도 물때를 잘 맞춰야 했어요. 물이 안 빠지는 날에는 우리 아버지 어깨가 그렇게 무거워 보 이더라고.” 형제분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 예종구 선생님의 아들이신 예문탁 선생님은 6.25 전쟁에 참전하셨다. 해병대 14기 의장대 출신이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셨다. 현재는 93살로 본가에 살고 계신 아버지는 오형제에게 방파제 같이 든든한 분이셨다. “옛날에 동네에 거지같은 사람이 하나 서있더래요. 우리 할머니가 소리를 질러서 나가보니까 아버지가 오 셨더라고요. 멋있는 의장대 출신인데 전쟁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죠. 저 아래까지 내려갔다 올라오시는데 6년이 걸렸대요. 총 한 발 안 맞고 돌아오셨어요. 복 받은 거죠.” 3 ‘구슬치기’의 비표준어. 예종구 생가 송산지구3.1기념사업회관 앞에서, 예종길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