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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177 독립운동가 박춘흥아버지 박죽영 러 왔던 기억이 나요. 저희 아버님 살아 계셨을 때는 할아버지에 대해 물으러 사람들이 오면 다 아버님이 이야기 해주셨어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옆에서 듣기만 했 는데 지금은 제가 하네요.” 박성국 선생님은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박춘흥 선생님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다고 한다. 평생 술, 담배도 안하시고, 다른 이와 말다툼도 없으셨다고 한다. “생전 누구랑 시끄럽게 지내시지도 않고 조용하게 신문을 보셨던 모습이 생각나요. 귀만 어두우셨을 뿐이지 건강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참 다행이죠.” 고향을 지키는 사람 박성국 선생님의 아버지 박죽영 선생님은 공공기관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 셨는데, 6남매를 먹이고 입히기에 넉넉하지 않았다. 어렵게 살면서도 아끼고 아껴 자식 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보내셨다. 지금은 다들 외지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지만, 집안 의 막내아들인 박성국 선생님은 송산에 남아 아버지를 모셨다. “저희도 형제가 많으니까 형편이 어려웠어요. 한번은 어머님이 일주일을 물만 먹고 버티 셨는데, 얼굴이 이만큼 붓더래요. 아무것도 없는 걸 어떡해요. 그래도 부모님이 열심히 사셨어요. 공부시키는 것만큼은 부족함이 없었으니까요. 작은 아버지들은 다 서울로 학교 보내시고, 저희 형제도 그 시절에 고등학교, 대학교 다 나왔어요. 어려워도 가르 칠 건 가르쳤으니까….” 박성국 선생님은 송산면에서 사강석재를 운영하며, 사강 1리의 이장으로 마을의 이곳저곳 을 살피고 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송산을 지키는 이로 남았다. 한 가지 후회되는 것 독립운동가 박춘흥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 간 뒤, 일본군은 송산 지역 마을 곳곳에 방화를 했다.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집을 잃었고 급하게 흙으로 집을 만들어 살았다. 독립운동가 박춘흥 선생님 가족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물어보니, 잘 모르신다며 그 점이 참 후회된다고 말씀하셨다. “살 곳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스쳐지나가는 말로 듣기만 했어요. 할아버지가 살아계셨 을 때만 해도 저는 독립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저희가 손자고 성숙한 나이가 아니었으 니까 그런 말씀을 잘 안 해주셨는지도 몰라요. 지금 같으면 이야기 나누면서 더 자세히 물어 보고 그랬을 텐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던 게 참 후회되고 아쉬운 거죠.” 송산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외적으로 송산 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박성국 선생님도 어려서부터 큰 영향을 받지 못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송산 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독립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이뤄지 고 있다. 한 가지 예로 매년 송산면 사강리에 있는 ‘송산 지역 3.1 운동 기념탑’에서 독립운 동을 기리는 제례를 지낸다. “제례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제가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모든 일은 아버지가 하셨어요. 광복회원이니, 행사니…. 송산 지역이 독립운동을 먼저 시작한 곳으로 의미가 큰 곳인데, 송산 지역이 잊히고 있어서 안타까워요. 마을을 위해서 지금은 몇 분이 고군분투하고 계세요. 대부분 바쁘기도 하니까 잘 협조가 안 되는 부분이 있죠. 마을이 잘 조성되어서 아이들이 ‘우리 고장에 이런 훌륭한 분이 계셨구나.’하고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박성국 선생님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사강 1리의 이장으로서 송산 지역 독립운동가 분 들이 재조명 받고, 독립운동의 정신이 보존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굳 은 의지를 보여주셨다.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