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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175 나라를 지킨 할아버지를 또렷히 기억하는 손자 박성국 선생님은 송산면 사강 1리의 이장이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이자 독립운동가 박춘흥 선생님의 손자이다. 박성국 선생님은 늘 할아버지인 박춘흥 선생님의 독립운동 기사를 가지고 다닌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주며 송산 지역 독립운동을 소개하는데, 주변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에게도 출력하여 나눠줬다고 한다. 그만큼 송산 지역 독립운동에 자부심이 있고, 역사를 지켜나가려는 마음 이 강하다. 현재 송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독립운동가 자손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송산에 남아 송산 지역 독립운동을 알리고, 그 정신을 지키려는 분 중의 한 분이 바로 박성국 선생님이다. 박성국 나의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송산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박성국 선생님은 독립운동가 박춘흥 선생님과 함께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셨다. 독립운동 그 후의 삶이 어떠했냐는 질문에 박성국 선생님은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세월이 생생하다고 대답하셨다. 왜소한 체격에 말씀이 없으셨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고 굳건한 분이셨다고 한다. 박성국 선생님 은 할아버지를 가만히 떠올리면서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어요. 그래서 잘 알아요. 수많은 기록에 있듯이 그렇게 힘들고 어 렵게 생활하셨다고 해요. 저한테는 고문당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손톱을 뽑고, 발톱을 뽑고 그랬다는…. 그렇게 한동안 있다가 나오셨는데 귀가 안 들리시는 거예요. 하도 귀를 맞으니까 작은 소리도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조금 잡수셨어요. 어린 마음에 왜 못 들으시는지 물어보면 당신이 너무 귀를 맞으셔서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독립운동가 박춘흥 선생님의 예명은 박영호이다. 집에서는 예명으로 불리곤 했다. 박춘흥 선생님은 태어나서 한평생 농사를 지으시다가 송산 지역 3.1 운동에 참가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셨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간 58명 중에서 제일 어렸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7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독립운동가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가장이 옥고를 치르는 와중에 남은 가족은 일본군을 피해 도망다니며 생활하다보니 집안은 풍비 박산 나 있었다. 박춘흥 선생님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자녀 중 한 명은 6.25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감옥에서 나와서 참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당시에 독립운동가 집안은 가세 가 기울 수밖에 없었어요. 형편이 정말 어려웠죠. 지금은 작은 아버지와 고모만 살아 계세요. 할아버지는 송산 지역 독립운동가 중 마지막 생존자셨어요. 그래서 많이들 뵈 독립운동가 박춘흥의 증언이 실린 기사, 1967년 조선일보 중 발췌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