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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163 왜 송산인가? 화성시 3.1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 송산 지역 조상 대대로 화성시 송산면에서 살아온 이병길 회장. 그는 송산 지역 3.1 독립만세운동 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널리 알리고자 송산 3.1운동 기념사업회 활동을 맡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병길 회장은 ‘송산 지역 독립운동가 마을 조성 사업’을 진행하는 과 정에서 화성시청 및 관련 기관과 주민 사이 가교 역할을 훌륭히 완수해주었다. 그는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하지만, 송산에서 민중의 울분이 폭발, 독립운동으 로 나아가게 된 경위를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병길 회장에게서, 하필 ‘왜 송산인 가?’ 에 대한 답변을 들어본다. 삼국시대부터 송산 지역은 대한민국 해상 교통의 관문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육로가 발전되지 못했을 때 실크로드의 관문인 마산포 뱃길을 통해 중국과 교류가 활발 히 이루어졌습니다. 한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송산 지역을 지나야 했고, 이 때문에 송산 지역 주민들은 일찍이 교육·예술·문화 등 다양한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도, 선감도, 인천, 멀게는 충청도 등으로 통하는 해로의 중심지였습니다. 송산 지역은 삼국시대 때 당성이 축조되었을 정도로 삼국의 항쟁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였습니다.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 마산포 인근 당성에 머무르 며 일어난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들어온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군대가 마산포에 주 둔했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잡혀 중국으로 압송되어 갔던 항구도 마산포입니다. 시화호 건설로 더는 물이 들어오지 않지만 수많은 어선과 장삿배가 드나들었던 마산포는 중국과 교류의 핵심적인 항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마산포를 통해 들어온 외국의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과 함께 교육, 의료 활동을 펼쳤습니 다. 새로운 사상과 학문은 이내 송산 일대 마을 곳곳에 유입되어 지역사회의 문화를 이끌 었습니다. 타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사립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지역 주민들은 근대 학문 과 사상을 교육받았습니다. 그 교육과 잦은 교류 덕에 송산은 풍족했고, 성숙했던 곳이었 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을 거치며 송산 지역 주 민들은 많은 것을 빼앗겼습니다. 염전, 농작물, 노동력까지…. 무역의 중심지였던 탓에, 그 약탈의 규모는 실로 파괴적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양반이 많이 살아 인심도 후하고, 정직 한 마을로 불렸던 마을이었건만, 일제는 그런 송산 지역 사람들을 ‘인심이 나쁘고 배일사 상이 격렬한 이들’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 송산 지역 주민들은 차별과 약탈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느꼈고,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3일에 걸친 독립만세운동을 부 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에 휘둘린 소요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 모두 옳 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불의에는 항거해야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어난 것이었습 니다. 이러한 함성은 송산 지역 일대를 넘어, 화성 전체로, 경기도로 나아가 사람들의 가슴 을 움직이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송산 지역 3.1 독립만세운동을 알기 위해서는 송산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과정과 결과,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해서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 해야 합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아픔과 수모를 겪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타 깝게도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혹독하고 끔찍했던 일제강점기를 때때로 잊어버리곤 합니 다. ‘송산 지역 독립운동가 마을 조성 사업’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 는지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남양관계서류』, 규장각, 도서번호 22048 남양지방금융조합 이사 이로카와가 탁지부 대신 임선주에게 보낸 보고 중 이병길 송산3.1운동기념사업회장 Part 03 송산 지역 만세운동의 역사 왜 송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