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page

204 205 와 은잔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홍헌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고, 무상으로 내 어주어 수령한 명부를 사람들이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인근의 독립운동가, 홍열후 선 생님은 홍헌 선생님을 기리며 마을 대표로 만장(挽章)을 써서 남기니, 다음과 같다. 착한 사람이 복을 누리지 못하니 이치가 이에 어긋난 것이라 하늘을 우러러 물으며 뭇사람들이 슬퍼하네 옛날을 생각하니 인을 펼쳐 네 마을에 은혜를 펼치더니 지금은 한을 남겨 조부모를 눈물짓게 하네 좋은 재목이 성취되기도 전에 바람에 꺾이고 아름다운 그릇을 이루지도 못하고 옥이 부서져 흩어졌네 무수한 사민들이 눈물을 떨구니 하늘도 응답하듯 부슬부슬 비를 뿌리네 4개 마을민 대표 홍열후는 두 번 절하고 곡하며 애도합니다. 독립 운동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누군가는 총칼을 들고 군에 들어가 항쟁했으며, 누군가는 장터에서 만세를 외쳤다. 누군가는 감시를 피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홍헌 선생님 역시 거친 풍랑 속에서도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었기에, 우리 는 그분을 독립운동가라 기억한다. 은주전자와 은잔, 마을주민 제작(출처 화성시 역사박물관) 사리인민대표 홍열후 만시(출처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노블리스 오블리주, 대를 잇는 미덕 “우리 옛 집에 연자방앗간이 있었는데, 정월이나 명절 같은 때 보면 부랑자들이 막 열댓 씩 몰려와. 그 사람들 오면 거지 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 오셨다고 그래. 할머니 들이랑 어른들이 밥 내어주라 해서 밥 먹이고. 후덕한 집안이라고 소문이 났어요.” 홍헌 선생님 이전부터 살던 옛 집, 그곳에 가면 연자방앗간이 있었더란다. 홍완유 선생님 도 연자방아에 얽힌 어릴 적 기억이 있는데, 명절 때면 온갖 부랑자들이 그 앞으로 몰려 들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을 집안에서 내쫓기는커녕 손님이 왔다고 상을 내어 밥 먹이 는 것이 흔히 있던 일이었단다. 이는 할아버지인 홍헌 선생님 이전부터 시작해 아버지 인 홍종후 선생님과 집안 어른들 모두가 당연하게 여겨 지켜온 문화라고 말씀하셨다. 천한 사람이라 하여 박대하지 않고 극진히 대하는 모습은 과연 홍헌 선생님이 실천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유산이 대를 이어왔음을 느끼게 한다. 홍헌 선생님의 아들이 되는 홍종후 선생님 역시 그 정신을 실천하신 바 있는데, 서신중 학교를 세운 일이다. 홍씨 일가의 한 친척과 함께 길을 거닐던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경기 서부 일대의 간척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던 때라 서신, 송산 일대에 바 닷물이 들어오곤 했다. 그중 일본인이 광복과 함께 버리고 간 땅을 유심히 바라본 홍종 후 선생님은 ‘저 자리를 염전으로 만들면 쓸 만하겠다.’ 하고 작업에 착수했더란다. 친 척 한 분과 함께 각 5만 평, 총 10만 평의 염전을 만들어냈다. 이어서 재단을 만들고 염 전 땅을 기부하니, 비로소 서신중학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홍완유 선생님은 얼마 전까지도 ‘홍의원’의 의사로 활약해왔다. 청년시절 군의관으로 활동하면서 전역 후 미국의 전도유망한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선생님 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신의 보전보다도 가문의 후계자로서 가족을 책임지는 것이 아버지 홍종후 홍완유, 의대생 시절 Part 04 기억하는 사람들 기 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