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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가 박문희(朴文嬉) 의사 (1901.10.21.~ 미상) 서기 1901년(광무 5년) 10월 21일 당시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북천동 405번지)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1883~1918)과 모친 김맹련(金孟連)(1993~1971) 사이 3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1914년 동래공립보통학교(현 내성초) 및 1919년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를 졸업하였다. 동래고보 재학 중이던 1918년 1월, 대한제국 탁지부 측량기사 출신인 부친 박용한이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로 다대포에서 자결하였다. 종교활동(1919~1925) - 당시 모친 김맹련은 성결교 동래복음전도관(현 온천중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박문희는 1919~1922년 성결교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 수학(11회 졸업) 후, 경기 안성성결교회, 경남 통영성결교회, 서울 독립문성결교회 등지에서 개신교 목회자(성결교 전도사)로 1925년까지 시무하였다. 경성성서학원 동기이던 경북 현풍 출신 이상철(李相徹)(1897~1935)의 주선으로 1924년 이상윤(李相潤)의 장녀 이도금(李道今)과 혼인하였다. 이도금은 당시 미국 북장로교 운영의 대구 신명여학교(현 신명고)를 졸업한 바 있다. 사회운동(1925~1930) : 청년연맹, 신간회 - 경남 동래에서 1925년 11월 동래청년연맹 창립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2월 경남 마산에서 경남청년연맹 조직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사상단체 동래혁파회(革波會)를 조직, 서무부 위원으로 경제학 등 사회과학을 연구하였으며, 1927~1928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경제학을 수학하였다. 1929년 1월 신간회 동래지회 정치문화부 총무간사 및 본부 대표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 부산 대표로 참가, 중앙상무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강연내용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의 검속을 받았다. 또한,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도모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자 단식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임 되었으나, 동년 12월 신간회를 탈퇴하였다. 박문희는 신간회 운동이 이념투쟁보다는 온건화를 통한 민중계몽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신간회 우경화 경향을 비판하던 강경파의 공격이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지원(1932~1934) : 의열단 - 1932년 8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외당숙 김두봉(金枓奉)(1889~1961)을 만났고, 이후 난징[南京]에서 여동생 박차정과 매부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의열단은 국민당 정부 자금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교를 준비 중이었는데, 김원봉이 국내에서 동교 지원자 선발을 부탁하자 박문희는 1932년 9월 국내로 돌아와 10월초 입교생을 선발하여 중국으로 보냈고, 본인 또한 동년 10월말 중국으로 가서 동교에 합류하였다. 1933년 12월 동교 입교생 추가 모집을 위해 국내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1934년 1월 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던 1기 졸업생이 일경에 체포되면서 그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수감 및 은둔(1934~1945) - 1934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동년 6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 기간 중(1934년 10월) 동생 박문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1936년 6월 만기 출소 후,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경영하면서 사실상 은거생활에 들어갔으며, 1944년 일제의 압박이 거세어지자 경북 달성 소재 과수원에서 칩거하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을 맞이하였다. 정당 및 언론활동(1945~1950) : 한국민주당, 조선공화당, 대중일보 - 1945년 8월 상경하여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가 1946년 10월 탈당하여 12월 김규식(金奎植) 중심의 민중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외재당숙 김약수(金若水) 중심의 조선공화당 창당에 참여,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월 부산으로 낙향하여 좌익성향으로 분류되던 일간지 대중신문을 인수하고 대중일보로 개명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대중신문은 김두봉의 외사촌이자 박일형의 장인 김형기(金炯琪)(1896~1950)가 1945년 12월 창간하였으나, 김형기는 사찰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가 심해지자 결국 '향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본분인 의사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자신 명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1949년 10월 박문희는 대중신문을 김지태(金智泰) 사장의 부산일보에 합병시키고 사장에서 사임하였다. 1950년 6월 서울에서 체류하다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2018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