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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김용규 공은 김해 김씨 삼족당 선생 대유공의 13세손으로서 1895년 1월 24일 경산군 남산면 반곡동에서 응두공과 수원 백씨 윤선 여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대구 계성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로서 나라 일은 백성으로서 신앙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3.1운동 당시는 소학교 교직에 있으면서 전도와 국민회 비밀 결사의 임무를 띠고 각지를 순회 중 부 공과 동지 박승명과 함께 피검되었고 1920년 임정 군자금을 모금 중 동지 이종식과 다시 피검된 바 있고 그 뒤 기독교 경지사에 입사하여 흥사단과 내통하여 사원 모집 중 동지 정인과가 피검됨으로 실패로 끝나자 공은 한국의 독립은 장기적이고 국제 초세에 좌우될 것임을 판단 1925년 목사가 되여 경산교회 대구 서문교회를 목회하면서 외국인 선교사와 제휴하여 세계교회에 일본의 학정을 폭로하는 한편 미선교사 버그만을 통하여 헐 미국무장관에게 한국 실정을 알리고 대한독립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1938년 호주 미선교회장 부오란을 설득하여 호주 기독교총회로 하여금 일본의 학정과 교회 박해를 국제 여론에 호소하고자 시찰단을 파한케 하였고 동회 선교사 서덕기와 그의 부친과 회동하여 일본의 학정 즉 산업 착취 기독교 박멸 민족 말살 식민지 교육 강제 이민 농업 수탈 6개 조항의 횡포을 널리 종교계에 알리기로 합의하여 서덕기 부친을 도영케 했다. 미국인 범 태평양회 창설자가 내한하여 진주 부오란 자택에 유숙하게 되자 그와 밀담하여 학정 6개 조항을 구진하고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을 역설 대한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는바 그가 「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민족이라」하고 이 실정을 가맹 22개국에 선전하여 국제 여론에 호소해서 일본을 규탄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동년 6월 공이 시무 중인 진주교회에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해오자 공은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일제는 공을 위시해서 교인들을 연행 고문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는 한편 교회를 사교로 타락케 하자 공은 용단을 내려 「이 시국이 지날 때까지 신앙은 각 사처에서 보전할 것이고 교회당 출입은 금함」이라 게시하여 교회를 폐쇄하고 향리인 경산에 피신 은거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과 밀회를 계속하였다. 1939년 대구 헌병대에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도 굴하지 않았다. 끝내는 병보석 출감과 동시 금족령을 받고 경산읍 중방동 자택에 유거하면서 산록 모옥 단간을 우암사라 자호하고 일제화 되어가는 시국을 개탄하여 독립지사로서 언제나 어디서나 한복과 우리말을 애용하야 민족의식을 사회에 일깨우며 구국 설교를 끊치지 않았다. 조국이 광복되자 공은 곧 군민에 의해 경산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한국 민족대표자 대회 경산대표 및 중앙 상임위원에 추대되었고 경산군수 경상북도 인사처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건국의 기틀이 잡히자 공은 본연의 성직으로 돌아가 경북노회장 대구고등 성경학교장 전국 기독교 구국회장 및 대구 남산교회를 목회하였고 만년에는 대구 산격동에서 동우 성노원을 운영 중 서거하니 향년이 74세였다. 평생을 애국과 신앙으로 강직 청렴하게 일관한 공이야 말로 참된 애국자요 기독인이라. 이에 동지와 교우로서 의의를 짚어 공의 높은 뜻을 기리며 묘비에 명하는 바다. 서기 1977년 10월 일 기미독립선언민족대표 연당 이갑성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