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page


39page

예산군 이남규 삼절묘
39page

平州 先生 韓山李公 昇馥 之墓(평주 선생 한산이공 승복 지묘)
39page

이승복(李昇馥)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한말 애국지사 이남규(李南珪)의 손자로 형 이민복(李敏馥)과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주하였다. 그후 1913∼1919년간 노령과 북만주(北滿洲)에서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永)·이시영(李始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1920년에는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동년 7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박용만(朴容萬)·이민복·조성환(曺成煥)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지원하기 위해 김병희(金炳僖)와 함께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21년에는 이시영·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제(聯通制)의 조직결성을 위해 힘썼다. 1923년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동년 7월 홍명희(洪命熹)·홍증식(洪增植)·김 찬(金燦) 등과 함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였다.
39page

또한 1926년 9월에 개최된 사상단체 정우회(正友會)의 집행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동회는 정우회선언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제휴를 주장하여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인 신간회(新幹會) 결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1927년 1월 신간회 결성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동년 2월 동회의 지회 결성에도 힘써 1927년 11월 이관용(李灌鎔)·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신간회 예산지회를 주도·조직하였다. 또한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27∼1931년 동아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창달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진상을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안재홍(安在鴻)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南京)·상해(上海)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원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의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