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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생 이은덕을 그의 하숙방(서원방 2층)에 초지 비밀 항일단체를 결성키로 합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일본대학 김학구 전수대학 이건수를 영입하였으나 집합장소 불안으로 명치고관 미망인 이등킹 노파집 2층에 하숙방을 옮기고 몰래 일본인 가장 가명을 송본효일이라 하였다. 그 뒤 상 야음 악학교 안수현 동경 철도학교 박곤태 동양대학 김재석 마포수의학교 최성탁과 고물상 장남 박서운개를 포섭 기묘(1939년) 2월 8일 동경학생 독립선언 기념일에 상해장에서 오료하고 9인이 박서운개 창고에서 밀회 교포 학생 동지회라 정하고 선생을 총책 겸 재무 김덕곤을 국내책 김홍구를 동원책 이은덕을 전단 선전책 이건수를 조직 책 안수현을 정보책 박곤태를 무기 화약책 박서운개를 각 제작품 보관책 김재석을 연락통 정책으로 분담 굳은 맹세 아래 거사일은 명치신궁 조경 야구전날로 하고 폭파 목표물은 이중교와 시내 중요 관서로 정하였다. 거사용 폭탄 8개와 전단 천여 장을 준비 완료 투탄자는 선생과 박곤태 김홍구 이은덕으로 정하고 대한 청년 결사대라 명명 만약 실패 시엔 한청을 새긴 칼로 자결을 맹세 그 칼은 현재 선생 댁에 보관 중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이 투탄 거사를 단행키로 하였으나 기묘(1939년) 10월 8일 선생이 왜경에게 체포되자 이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다행히 김덕곤 김재석 이건수 박서운개가 은신 물증이 전무하였으므로 결사 내막을 파헤치지 못하였다. 선생 등이 1년 6월간 살육적 고문에도 함구 일관타가 이은덕 안수현은 옥사하였다. 국내책이 체포되자 선생과 박곤태 김홍구도 신미년 4월 염일 부산 이송 혹독 고문을 감행해도 별무성과이므로 왜적들은 동년 11월 18일 치안유지법 위반 죄명으로 선생에겐 2년 김덕곤 김홍구 박곤태에겐 각 1년 징역을 선고함으로써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만년 독립유공자 협회 전국부회장 겸 대구 경북 지회장을 재임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배 수원 백씨 숙덕 있었고 남 동준 동흡 동진 서생 배우순 녀 경희 손 병대 병호 외손 재현 여는 불진록 선생 현합이 蝸廬(와려)를 찾아와 명을 청하므로 𧩮識(소지)이나마 塞責(색책)한다. 오호 의기 늠늠 추일을 능가하고 고회 초연 해운을 통하는 선생은 거룩한 민족 의사였다. 실로 崑丘驪壑(곤구려학)도곤 높고 깊은 그 奕德(혁덕)을 후세에 길이 빛내기 위해한 정민에 새겨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