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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시키고, 다시 제 2차 전략을 은신 획책하다가 또 3년간 유인되었으며 1921년 3월 세브란스를 졸업하여 1923년까지 세브란스 의원 의사로 있다가 1945년 대구로 옮아 개업하나, 이때 왜인 항복, 국가 재조의 즈음이라 지방인은 그를 기다려 모든 일을 담착시켰으니 예를 든다면 진주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장, 대구박물관 기성회장, 대구대학 기성회 위원, 그 익년 한미협회 경북지부장, 대구 지방심리원 조정위원, 대구검찰청 사법보호위원, 대동청년단 경북단부 후원회장, 대구 소방 후원회 부회장, 또 1948년에는 한국민주당 대구시 집행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북 연락부장, 동회 감찰위원장, 잇달아 동회 대구시당 부위원장, 대구박물관 후원회 부회장, 대구 시국 대책위원회 고문, 익년 드디어 경북국방협회 이사 등이었다. 그러나 시국의 차차 안정됨과 나이 늙으므로 그 익년 드디어 일단 공직을 사퇴하고 1963년 의업도 폐하고 여령을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7월 3일 고종하니 향년 78이오. 이부인은 한산 이씨로서 1890년 1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고의 휘 창식이다. 1908년 정신여중을 나와 1911년 일본 동경여자학원 영문과에서 전일녀들을 누르고 최우로 졸업하여 정신학교 교사로, 성진 보신여중 교사로 1918년까지 재직하고, 다시 원산 마르다윌스 성경학원에 1920년 졸업하자 대한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권유한 까닭에 3년간 유인되었으며 1924년 부산 성경학교에, 1926년 대구 성경학교에 재직하였으며, 1945년 복국되자 대한부인회장, 대한적십자사 중앙이사 겸 조직위원, 익년 대구 제일교회 집사 겸 권사, 1951년 대구 수석교회 장로로 각각 피선되었으며, 1963년 국가에서 건국 공로상으로 표창하였으며, 1968년 1월 4일 귀천하니 향년 79라. 이 두 분은 동성동지로서 1923년 성혼하였으며, 이곳 오향에 쌍분되었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