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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인 안윤재(윤재) 선생은 서기 1877년 11월 17일 황해도 송화군 장양면 평촌리에서 안창운의 장남으로 출생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고 재주가 뛰어났다. 1905년 망국조약 시는 동지를 규합하여 5적의 성토와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1907년에는 안창호 양기택 김구 이동녕 등의 동지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 투쟁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향리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1년 105인 사건(사내 총독 암살 사건)으로 신민회 간부요 기독교 지도자인 선생은 양기택 김구 이승훈 류동설 안태국 임치정 주진수 김도희 옥관빈 등과 함께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사건과 안명근 사건 등으로 전후 8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1919년 3월에는 송화 수교를 비롯한 황해도 일대와 진남보 등지의 독립 시위를 주도 지원하였으며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동년 11월 임시정부 조사원으로 밀입국하여 임무를 수행 중 주구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져 1922년에는 만주 길림으로 다시 망명 양기택과 함께 의성단 통의부 정의부 조직에 참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쓰는 한편 독립군의 군자금과 군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황무지를 개간 영농하며 본가는 병사로서 연락처로 제공하였다. 1932년에는 길림성 연통산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교회의 영수와 교장을 역임하면서 지하 활동을 하였다. 1944년 2월 27일 광복을 못 본 채 향년 68세로 길림성 산성진에서 소천하시다. 1977년 12월 13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이 추서되다. 보훈처와 광복회 및 대구시의 지원으로 1989년 10월 14일 대구직할시 독립유공자 선열묘역에 이장 건비하다(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