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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왜관 항일학생 의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나라 없는 설음을 몸소 겪으시고 이 사건을 계기로 조국의 자주 독립과 민족의 자유 평등을 목적으로 피끓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백의단을 만들었다. 17명의 동지 중 공은 부단장으로 1년 6개월 동안이나 활동하셨다. 1941년에는 문예부 연구부 회원들과 규합하여 강대한 항일 단체로서 35명의 동지들은 마침내 비밀 결사 차혁당을 조직하여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하였는데 그때도 부당수로서 중책을 완수하였다. 민족 말살 정책에 혈안이 된 일제는 우리 말과 성씨까지도 빼았아 가던 때라 문예부 회지 "반딧불"이 일경에 발각됨에 전당원이 체포되어 3년 9개월이란 긴 세월을 생지옥 같은 영어 생활을 보내야 했다. 기간 악독무도한 고문에 못이겨 동지 5명은 마침내 옥중에서 순국하셨다. 구사일생으로 공은 광복을 맞아 1946년에야 뒤늦게 추졸의 영광을 얻었다. 이때부터 초중고등학교의 교사로서 소신있게 후진양성에 진심 갈력하였으며 1956년에는 더욱 고원한 뜻을 펴고자 대구 사범대학교 교육과를 졸업하신 만학도가 되기도 하셨다. 그 후 도장학사 과장 국장 및 각 중고등학교장으로 봉직하시면서 탁월한 교육력을 끼치셨다. 1986년에 국민훈장 자유장을 받았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였셨다. 그러나 그렇게도 원하시던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보지 못하시고 애석하게도 1992년 10월 28일 향년 73세로 서거하시니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지부장으로 대구 선열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인 평산 신공악 여사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용주 차남 호주 3남 태주 4남 창주이며 장녀 옥태 서 오동광 차녀 경연 서 한태동이다. 손에는 장남에 병건 병진 3남에 병규 병관이가 있다. 겨레의 역사 오램이 자랑이 아니요 그 역사 속에서 참되게 삶이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