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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운동 단체인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왜경에게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셨다. 귀국하여 대구 사범학교에 입학하셨는데,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은, 가난한 수재급 학생들을 모집하여 관비로 철저한 황민화교육을 시켜서 일선학교에 배치하여 황민화 교육을 전담시킴이 사범학교의 특성이었다. 정의감이 강한 선생은 비밀결사 무하원을 조직하여 기관지 무하원을 발간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범학교의 독립운동은 역사적으로 대구 사범학교만이 독립운동을 하였다. 1941년에 졸업하여, 경산시 진량국민학교에 교사로 봉직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비밀결사의 활동이 왜경에게 탐지되어 1943년 6월에 체포되셨다.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물리치고 부정으로 일관하였으나 3년형의 옥고를 치르면서, 옥중 투쟁을 하던 중, 8.15의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셨다. 선생은 교육계로 되돌아 와서, 1949년에 약관 29세로 경산시 안심국민학교의 교장에 취임함을 필두로, 여려 학교에서 교장직을 역임하여, 훌륭한 국민교육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80년,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지부 제9대 지부장에 취임하셔서 광복회의 위상을 높이고, 회원들의 복지 향상에 노력하였으며, 조국 통일을 위한 강연을 많이 하셨다. 선생은 두 차레에 걸처서 옥고를 겪으면서, 일제의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득병하여, 1981년 4월 6일 새벽 4시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인 김해 허봉선 여사는 부덕이 있고, 슬하에 4남 3녀를 두셨는데, 장남 동환은 남양 홍순호와, 차남 승환은 경주 김윤수와 결혼했으며, 3남은 상환, 4남은 창걸이다. 장녀는 영임이며, 차녀 경임은 진주 정상민에게, 3녀 경환은 수원 백경에게 출가했다. 손자에 영민 영진 성호가 있다. 칠곡 지천면에서 이곳 선열공원으로 모시고, 선생을 기리고 존경하며 삼가 비명 한 장 지어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