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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강의사는 나라 사랑의 신념이 뜨겁고 계략이 슬기로운 지사이었다.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면서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자 의사는 나라 구원의 큰 뜻을 세워 김덕호 장복한 박의관 김학봉 등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1908년 고장 쌍암에서 3도 사람이 의거했는데 여러 고장에서 호응하는 사람이 시간과 함께 늘었다. 막료 김화삼 김양화 김명거 권덕윤 김병학 최성재 외에 나철 문재빈 조봉식 장응권 조문현 장육권 조규하 등 500이 넘는 정병을 모으로 광주지구 김태용 부대 보성지구 안담산 부대와 협동하여 곡성 구례 순천 고흥 여수 광양등지에서 일본병대와 50번이 넘는 싸움에서 번번이 이겼는데 특히 고흥과 과역에서 자칭 삼국대장이란 사람을 비롯하여 수백사람을 베어 그들의 사나운 힘을 꺾었기에 세상사람들이 그 이름을 마음에 담아 강대장이라고 불렀다. 1910년 나라가 없어지면서 형세 외롭고 기운이 다하여 쌍암 두모리 장영섭의 집에 있다가 일본 병대에 포위되어 홀몸으로 싸워 그 우두머리 마쓰다를 베어 죽이고 사토오를 찌른 후 잡혔는데 끝까지 일본정부의 무도함을 꾸짖고 혀를 끊어 자결하니 그나이 44이었다. 장하게도 의사는 초야의 사람으로서 나라 구원과 겨레 사랑의 높은 염원을 안고 몸을 죽여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를 세웠다. 여기 우리의 발의와 이 고장 여러 사람의 힘으로 이 비를 세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사의 행적을 거울삼게 하고싶다. 1968년 순천 성산 양로회원 일동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