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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규는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伊院面)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고 한다.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해(上海)에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비서로 취임하였다가 이어 비서장(秘書長)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5월 상해교민회(上海僑民會)에서 설립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그 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나창헌(羅昌憲)·최석순(崔錫淳)·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彈劾案)을 제출하고, 나창헌을 심판위원장으로 한 탄핵심판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탄핵안을 심리한 뒤 임시의정원에 보고하여 면직 처리케 하였다. 1926년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 307호에 명성(明星)사진관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의 비밀연락장소로 제공하였다. 1927년 10월 상해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선거에서 상해교민회 단장으로 선출되어 상해 교민들의 생활안정 등을 위해 활동하면서, 3·1절 기념식 등을 교민회 주최로 개최하여 교민 300여명에게 3·1정신을 앙양시키며 활동하다 1929년 8월 9일 사임하였다. 1929년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사하여 성광(星光) 사진관을 개업,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활동케 하였다. 이어서 1931년 9월부터 윤봉길(尹奉吉)을 사진관에 은신 기숙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郭重善)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해의 지리와 풍습 등을 알려주고 장차 거사에 대비케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忠淸道)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의 홍구공원(虹口公園)의거 후 남경(南京)·한구(漢口)·우후·구강(九江)·사시 등지를 경유하여 중경(重慶)으로 전란(戰亂)을 피하여 이동하였다. 1933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韓族唯一獨立黨促成會)의 간부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한국독립운동자동맹(韓國獨立運動者同盟)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공산당(共産黨)과 제휴하여 강소성(江蘇省) 법남구지부(法南區支部)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 신의주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천진(天津)에 있는 동생 곽중혁(郭重赫)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년 9월 상해의 가족들과 비밀 연락을 취하던 동생 곽중선이 괴한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동생의 죽음에 애통해 하였으나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1938년 석가장(石家莊)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