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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90 하여 일본인 이민 100만호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당초 개획은 실패하였다. 그 대안으로 한반 도 남부의 수전농법을 익숙하게 구사하는 한인들은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게 됐 다. 만주국은 만주 개척을 내세워 한인들을 대거 만주로 집단 이주시켰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 지 부작용이 속출하였지만 만주국은 왕도낙토를 선전구호로 내세우면서 집단이민을 독려했다. 충 청북도 사람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같은 해 김의환(2-44)은 광무양안을 바탕으로 괴산군 능촌리 농민층의 토지소유와 경영형 태 를 분석하였다. 같은해 남금자(2-45)는 대한제국기 민영휘의 충주 일대 토지 소유와 경영 사 례 를 고찰하였다. 2015년 이용철(2-46)은 일제강점기 민영은의 유지활동으로 식민권력의 청주 지 역 침탈 과정을 규명하였다. 두 논문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고 있 을 때 친일 반민족자들은 호사호위 하고 있었음을 사료로 논증하고 있다. 같은 해 성주현(2-47)의 글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내지( 內地) 시찰은 일본의 근대성을 과시하 고 조선이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합리성을 체현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나아가 식민지 조 선의 전근대적 모습을 스스로 각성케 하여 일제의 식민지배의 조력자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시 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추진한 내지시찰은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본을 시찰케 하여 모 국의 개화된 발전상을 보고 후진적 조선과 비교시켜 조선인에게 ‘일제의 강대성’과 ‘조선독립 의 불능’을 인식시키려는 정치 선전 측면의 동화정책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정책의 하나인 내지시찰에 충청북도 유림계도 적극 참가하였다. 충북유림 내지사찰단은 충북도청 주최하에 1921년 9월 25일부터 10월 17일까지 22일 동안 야와타( 八幡) 미야지마(官島) 히로시마(廣島 ) 교토(京都) 토쿄(東京 ) 닛코( 日光) 야마타( 山田) 나라( 奈良)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 등지를 시 찰하였다고 논문은 분석하였다. 같은 해 김영미(2-48)는 충주시 주덕면 풍덕의 이세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서 새 마을운동기에 이르는 마을사와 구술생애사를 재구성하였다. 첫 번째는 `한일합방`이 추진되던 시기로, 1906년 방풍림계의 결성이다. 마을의 주민들이 곡식을 내어서 마을의 공유재산을 마 련한 것이다. 이러한 마을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이세영이라는 인물의 일제시기 외지 경험이 다. 그는 마을에 정착하기 이전에 도시 생활을 체험하였으며 일제말기 소년단 활동에 참가하였 다. 이러한 그의 경험들은 그가 가지고 온 근대적 매체들과 함께 마을 근대화를 추진하는 동력 으로 작동하였다. 그의 생애사에는 마을사와 국가사의 틀이 묘한 3중 구조로 유기적으로 연결 돼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같은 해 청주시(2-49)는 방대한 분량의 청주시 도시계획 변천사를 펴냈다. 청주대학교 산학 협력단이 엮은 이 저술은 본격적 근대도시화 과정을 밟은 1900년 초부터 청주·청원이 통합한 2014년까지의 도시 변천사는 담고 있어, 향후 지역사 연구에 대한 기초자료를 풍부히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2016년 홍순두(2-50)는 조선후기의 장시는 개항 초기까지는 남한강 포구나 인접지역의 증설 이 대부분이었으나, 일제통치가 이루어지면서 내륙지역의 신설된 교통로를 따라 증설하였다고 밝혔다. 이같은 현상은 충분한 수요기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보다는 군내 각 면지역에까지 유 통망을 장악하려는 일제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그의 논문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