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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87 1999년 서순화(2-3)는 충청지역 사람들의 통계와 내용을 고찰하여 사회사적 문제를 규명 하 려 하였다. 2001년 강신욱(2-4)은 5일장, 자연재해, 일제 강점기 각종 민족운동, 행정구역 개 편, 인구변동, 역대 지방선거 등의 주제를 바탕으로 증평과 괴산의 근현대사를 조명하였다. 현직 언 론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작업으로 증평과 괴산지역이 근현대사를 처음으로 집성하였다는 것 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002년 김동군(2-5)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면서 기독교가 충북지역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 의 하나로 전통적인 여성관으로부터의 해방을 꼽았다. 그는 도내 여성들이 한글을 배우고, 교회 활 동에 참여하면서 구습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고 논증하였다. 그러나 논문에서 당시 기독교계 의 항일 내용이 거의 다뤄지지 않은 점은 크게 아쉬운 대목이다. 같은 해 전순동(2-6)은 충북 북 부지방의 기독교 수용과정과 그 영향 고찰,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충북지역도 의료와 교육 사 업 우선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이 시기 한말의 진천과 충주지역의 사회경제에 대한 연구논문이 잇따라 발표돼 지역 학계 의 주목을 받았다. 최윤오는 2003년 「대한제국기 광무양안의 토지소유 구조와 농민층의 동향: 충 북 진천군 양안을 중심으로」(2-7)을 시작으로 2006년 「대한제국기 진천군 양안의 자작농과 경 영지주」(2-20), 2010년 「대한제국기 충주군양안의 지주제와 농민층분해」(2-33) 등 하나같 이 무게감 있는 주제를 연달아 발표하였다. 그는 ‘2-7’ 논문에서 진천현 양안을 분석, 당시 진천지역 농민도 상층과 하층민으로 크게 양 극화돼 있었음은 논증하였다. 그는 그 논거로 읍치라는 행정구역 안에 상업, 수공업, 기술직 계 층이 혼재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3-20’ 논문은 분석대상 공간을 면 단위를 넘어 군 전체 로 확대하였다. 그 결과, 농민층의 하향화와 상향화 추세가 가속화되어 허리가 잘록한 이른바 장 구형의 토지소유 분포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2-20’ 논문을 통해서는 당시 자작농이 자신의 소유토지를 기반으로 최대한의 잉여 생산물 을 확보하기 위해 집약적 농업을 채택하는 등 가족 노동력을 기본으로 적극적인 경영 확대를 추 구 했음을 논증하였다. 그는 연구공간을 충주지역으로도 확대하였다. ‘3-33’ 주제로는 당시 충 주 지역에 부재지주층이 많았고, 그 배경은 남한강 수운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규명하 였 다. 그의 이 같은 연구는 ‘광무양안은 허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이른바 ‘이 영 훈 학파’와는 견해가 다른 것이다. 2 0 05년 한말 춘 생문 사건의 희생자 인 이도철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 았 다. 같은 해 이민 원 (2-8)은 춘생문사건은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사이에 위치한 정치·외교·군사적 사건이자, 사 실상 아관파천을 성공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앞 단계의 ‘거사’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 서 춘생문사건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발생한 조선의 충군애국적 의병운동과도 맥락을 함 께 한다고 밝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희생된 조선 측의 대표적 군인이 훈련대 연대장 홍계 훈 이라면 춘생문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조선 측의 대표적 군인은 다름 아닌 참령 이도철이었다 고 결론지었다. 같은 해 오영섭(2-10)은 ‘향인들은 모두 이도철의 뛰어난 幹局을 칭송하며 향중의 대사를 모 두 그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는 제천향교의 校長 이 되어 校中 의 간활함과 과거의 폐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