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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조동호 (출처:공훈전자사료관)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조동호의 생가가 있던 곳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150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가옥 멸실 - 조동호( 趙東祜 , 1892~1954)는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유정(溜亭)이다. 1908년 경성측량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여운형과 교우하였다. 1914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징에 있는 금릉( 金陵)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뒤 1917년 상하이[ 上海]의 『구국일 보』(救國日報)와 『중화신보』(中華新報)의 기자가 되었다. 그 후 1918년에는 박은식( 朴殷植)·신 규식(申圭植)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 同濟社)에 참여하였고, 1919년 2월 신한청년 당 이사로 선출되어 조선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하는데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국무 위원, 독립신문 창간, 공제회 조직,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한국노병회(韓國 勞 兵會) 참여 등 여 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그는 당의 강령과 규약을 기초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 견되었다. 특히 그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동아일보 심양 특파원이 되어 재 만동포의 피해 상황 등을 파악 보도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시에는 중앙집행위원 으로 선출되어 일시 상해로 피신, 계속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체포되어 징역 4개월을 받아 복역하고 다시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국내 공산당 재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1933년 11 월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았다. 1944년 8월에는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조선인민당·조선 공산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 때 박헌영( 朴憲永)의 남조선노동당에 반대하여 여운형의 사회 노동당에 가담하였으며, 1947년 사회노동당의 후신인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정치협의회 위원이 되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낙향하여 1954년 생을 마감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05년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조동호 생가 터는 그의 판결문에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번지 불상( 不詳 )으로 기록되었으 조동호 생가 터 해외독립운동(만주방면) 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