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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20년대에 국내외에서 의열투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전좌한이 출생한 곳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죽항리 34-2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죽항리 66-1 가옥 멸실 - 전좌한( 全佐漢 1899.4.28~1986.4.15)은 옥천읍 죽향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인 전흥규 ( 全興奎)에게 비밀단체인 경성실업단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 명의의 납세를 거부하 는 문서가 도착하자, 전좌한은 동지인 임선재( 任善哉)와 함께 문서를 인쇄하고 배포, 게시하다 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고향의 김응선(金應先)과 함께 창의 단( 倡義團 ) 단원 계의산( 桂義山 )을 만나 총독부, 시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 하는 포고문을 살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실패하고 전좌한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음력 4월 초순경, 그는 길림성에 있는 유해강(柳 海崗 )의 집에 머물면서 비밀결사 조선 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을 조직하고 4~50명의 단원을 확보하여 군자금 모집, 경고문 인쇄, 배부 및 일제 주요기관 파괴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0월 1일 경복궁으로 옮겨 지은 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을 기하여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고, 그는 선발대 가 되어 김봉준(金鳳俊)과 함께 권총과 탄환 및 각종 문서를 가지고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동년 9월 22일 그의 매부인 신화수( 申華秀)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27 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3월 26일 출옥하였 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하지만 송상도( 宋相 燾 )의 『기려수필(騎驢隨筆 』(1955년 간행)에는 그가 밀정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1984년 「동아일보」에서 밀정 혐의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보도하여 독립유공자의 자격 시비가 처음으 로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된다. 전좌한 생가 터의 위치는 판결문에 본적이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죽향리 66-1번지로 기록 되어 있으며, 2008년 현지조사에서 이희목(죽향리 거주, 당시 79세)의 증언으로 생가 터를 확 전좌한 생가 터 해외독립운동(중국방면) 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