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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상해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곽중규의 생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486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486 가옥 멸실 - 곽중규( 郭重奎, 1891~1950)는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9월 미국인 선 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향하던 중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 다.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비서장을 역임하였고,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도 활 동하였다. 대한인거류민단 산하의 인성학교 교사가 되어 민족 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포 교육사 업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1925년 제13회 의정원 회의에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주 도적으로 제출하고 이를 가결시켰다. 1931년에는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 丙寅義勇 隊 )에서 활동하던 동생 곽중선(郭重善)으로 하여금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을 윤봉길에게 알려 주도록 하는 등 상해 훙커우공원 의거를 간접 지원하였다. 1933년에는 4월 상해로 돌아와 한 족유일독립당촉성회(韓族唯一獨立黨促成會 )의 간부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한국독립 운동자동맹(韓國獨立運動者同盟)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공산당( 共産黨)과 제휴하여 강소성 ( 江蘇省 ) 법남구지부(法南區支部)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밀정의 제보 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천진(天津 )에 있는 동생 곽중혁(郭重赫)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년 9월 상해의 가족들과 비밀 연락을 취 하던 동생 곽중선이 괴한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동생의 죽음에 애통해 하였으나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1938년 석가장( 石家莊)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 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곽중규의 부친 곽준희와 동생 곽중선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곽준희는 1907년에 거 의한 장운식(張雲植) 의진에 참여하여 민한식( 閔漢植)·임해준(任海俊)·김평근(金平根) 등의 동 지들과 함께 충북 옥천, 전북 금산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동하였 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일경에 붙잡혀 같은 해 6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곽중규 생가 터 임시정부 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