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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9년 3월 27일 이원면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199-1 일대 / 이원리 491-31 일대 충청북도 옥천군 이내면 이원리 시장 변형 현충시설(기미 3·1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15일 충 북 옥천군 이남면 수 묵리 육창문( 陸昌文)의 집에서 육창주( 陸昌柱), 허 상기(許相基)는 3월 27일 장날에 만세를 외쳐 군중들도 따라 부르게 하고 헌병의 제지가 있으 면 밀고 들어가며 만약 유치된 자가 있을 때는 이를 구출하기로 협의하였다. 이후 3월 26일 육 창주는 자택에서 국기 3기를 만들고, 3월 27일 이원장터에서 허상기와 육창주는 광목에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들고 시장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김용이, 허량, 공재익, 조기시, 최덕용, 이금봉, 김수원 등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를 외치며 시장 일대를 활보 하였다. 이에 이원헌병주재소 헌병들과 군청 직원들이 나서서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만세시위가 계속되자 헌병 등은 국기를 빼앗고 육창주, 허상기를 체포하여 끌고 갔다. 김수원 등 군중들은 뒤따라 주재소로 가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헌병들은 발포하여 이일만 의 아우가 순국하였고, 5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김용이, 혀량 등을 구금하였다. 그러나 오후 3 시 경 이일만이 죽은 아우의 시체를 짊어지고 주재소로 가서 큰 돌로 유리창을 파괴하여 구속 된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더욱 격렬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헌병은 만세시위 를 제지하기 위해 군중을 향해 다시 발포하였고 그 자리에서 2명이 순국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만세시위 과정에서 육창주 등 8명, 공재익 등 4명, 김수원, 허간 등은 재판에 회부되어 옥 고를 겪었다. 이후 정부에서는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면호·육창주·허상기에게 애국장, 김용이·김 수원·공재익·이금봉·허상구·허간·허량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만세운동이 전개된 이원장터는 2008년 현지조사에서 김암(이원리 거주, 당시 68세)의 증언에 의해 이원시장이 현재의 장소가 아니라 현리에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헌병주재소 자리도 고증 하였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서도 현리( 縣里 ) 마을이 현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원장이 섰 다고 한다. 반면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는 지금의 현재 옥천묘목시장 주변에 헌병주재소가 위치한 이원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3·1운동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