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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77 을 일제와 타협하려는 주의를 가진 적으로 규정하면서 절대독립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독립 에 서 한 발짝만 후퇴하면 나라를 망친 매국노가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추호의 타협이 없 는 '독립 뿐'이라는 절대독립론을 주장하였다. 단재는 3. 1운동에서 민중을 발견하며 민중직 접 혁명론을 주장하였고, 단재의 재중독립운동은 이 같은 독립운동론을 직접 실천한 과정이었 다 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같은 해 오영섭(1-64)은 유인석의 활동상을 고찰하였다. 김주용(1-65)은 사료를 바탕으로 그 의 독립운동을 재구성, 의의를 찾고자 하였다. 신팔균은 만주지역에서 대한제국기 군인으로 서 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학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 고, 남만주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도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는 군사위원장에 취임한 지 채 두 달도 못되어 훈련도중 적의 급습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처럼 그가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과 장 렬히 순국한 것은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저자의 견 해 이다. 2010년 충 북대학교 중 원문화연구소 가 『중 원문화연구』13에서 한말 의병활동과 일제강점 기 독립운동을 종합적으로 살폈다. 연구주제는 「단양 지역의 한말 의병항쟁」(구완회·1-66), 「 申圭 植 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활동」(김희곤·1-68), 「손병희의 꿈과 민족운동」(조규태·1-69) 등으 로, 모두 무게감이 실린 글들이다. 신채호는 독립운동 연구가들이 가장 많이 다뤄온 주제이다. 김기승(1-67)은 신채호의 역사관 이 독립운동의 실천과 한국사 연구를 결합시키는 노력 속에서 만들어진 실천적 역사관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같은 해 박걸순은 「3·1운동 공판기록을 통해 본 충북 출신 민족대표의 독립사상」(1-70) 글 에 서 6명의 충북출신 민족대표는 종교 계몽주의자의 한계를 지녔으나 그렇다고 민중과 완전히 절 연한 것은 아니었다고 논증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손병희가 한봉수와 홍명희 등을 통해 충 북 만세운동을 지시한 것 등을 제시하였다. 그해 박걸순(1-71)은 단재 신채호의 생가 활용 방안을 제사하였다. 그(1-72)는 또 같은 해 신 팔균의 생애와 민족운동을 전기적으로 분석하여 그가 대한제국 군대와 만주 독립군을 연결 하 는 가교적 인물임을 규명하였다. 2010년 이후 장승순의 왕성한 활동상이 주목된다. 그는 그해 「한말 충북지역 의병운동의 민 중운동적 성격」(1-73)을 시작으로 2013년 「일제강점기 충북지역 농촌사회의 변동과 농민운 동 - 1920∼30년대 초를 중심으로」(1-104), 2014년 「1920년대 충북지역 민족운동의 양상과 성 격」(1-110), 같은 해 「충북지역 신간회 괴산지회 활동의 성격」(1-111), 2015년 「1920년대 충 북 지역 청년회운동의 전개 양상과 성격」(1-118), 2017년 「1920년대 전반기 충북 영동지역의 청 년 운동」(1-129) 등의 주제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는 2015년 이후 청년운동에 천착하는 모습 을 보이고 있어, 이 분야의 향후 연구성과도 기대된다. 2 010 년으 로 돌 아가 구 완 회(1-74 ) 는 을 미의 병 당시 제 천 군 수 를 역임 한 정영 원( 鄭英源, 1851~1904)의 『피선기초(披燹記草)』을 분석하였다.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관군은 제천에 진 주한 의진과 시종 대치하는 관계였으나 무력은 의병의 전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반면에 의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