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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76 다. 20 07년 구 완회(1-4 8)는 『운강문집』과 그 의 저본이 된 『운강유고』를 비교·분석하였다. 해 방 후에 간행된 창의일록이나 운강문집은 그 저본이 된 운강유고에 비하여 하여 많은 면에서 부 실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밝혔다. 그러한 문제는 먼저 목판본이 운강 의 의병 활동지역을 벗어난 곳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후의 새로운 사회적 분위 기 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운강에 관한 자료는 당연히 필사본 자료인 『운강유고 』가 우선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해 김선경(1-49)은 1020년대 괴산청년회와 괴산청년동맹의 활동을 고찰, 그 의의를 살 폈 다. 1920년 초부터 전국적으로 청년단체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가운데 1920년대 충청북도에 서 는 51개의 청년단체가 조직되었고 그 중 괴산지역의 청년단체는 12개로 충청북도 내에서 활 발 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괴산청년회와 괴산청년동맹은 농민운동이 일상적 계급투쟁으로 서 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전형적인 농촌지역인 괴산의 지역대중 운 동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나아가 충북에서도 선진적 사회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큰 의 의를 지닌다고 논문은 논증하였다. 20 08년 충 북향토문화연구소는 『충 북향토문화』20집에서 일제강점기 충 북 을 집중적으 로 다 뤘다. 연구 주제는 「한말·일제 강점기 충북 지역 민족운동의 전개 –순국선열을 중심으로」(구 완 회·1-50), 「의병전쟁과 괴산」(김근수·1-51), 「한말 영동인의 항일 운동」(김윤호·1-52), 「일제강 점 기의 증평군일원 항일운동과 의병」(유병택·1-53), 「충주읍성 점령기 동안의 의진활동 연구」 (유 봉희·1-54), 「義兵大將 張忠植 · 張益煥 資料 」(유지상-지성룡·1-55), 「 堤川 乙未義兵 의 背景 과 意 義 」(이원희·1-56), 「청주진위대 해산 후 청주·청원지역 의병의 활동」(정경임·1-57), 「진천지역 의 병항일전」(정제우·1-58), 「보은군에서의 항일 의병활동과 기미 독립 만세운동」(최규인·1-59) 등 이다. 같은 해 박걸순(1-60)은 1920년대 申采浩의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을 고찰하였다. 그는 『조선 사연구초』를 중심으로 분석, 이를 192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 수준과 성과를 대표하는 저 술이라고 결론지었다. 권대응(1-61)은 호좌의진, 즉 제천 의병들의 영남지방 활동상을 고착하였다. 을미의병기 영남 지방으로 파견된 호좌의진의 소모장 서상열의 의병투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서상열이 영남지방에서 추진하였던 연합의진의 결성은 을미의병기 양반유생이 전개했던 대일항전의 투 쟁 역량을 강화시켜 국권수호운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의 그의 견해이다. 같은 해 한말 의병운동과 청나라 말기의 무장호국운동을 비교한 김종건(1-62)의 논문에 따르 면 두 운동은 몇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무장 활동의 발생 배경, 구호와 지향, 주도 세력과 주요 구성원의 성격 및 시간적 발전 과정에서 보이는 경향의 변화 등을 통해보면 공통 점이 더 크게 관찰된다고 논문은 밝혔다. 그는 청말 운동에 대해 아편전쟁 후 서양 오랑캐의 침 입으로부터 고향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보위신가( 保衛身家)의 이념이 대표적 구호였다고 주장 하였다. 이는 한말 상황과 비슷한 면이 있어, 향후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2009년 박걸순(1-63)은 논문에서 단재는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자치론, 외교론, 준비론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