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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73 취급했고, 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같은 해 장세윤(1-23)은 홍명희의 근대적 변용과 사상전환 과정을 살핀 후 그를 민족주의자 나 사회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홍명희를 유교 지식 인 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유교적 지식인은 언뜻 보면 양립될 수 없는 개념 으 로 보여 지는데, 다른 전공자들의 견해가 궁금하다. 2002년 김진봉(1-24)은 호서지방의 3.1운동은 대체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강한 의식보다 는 서울이나 인근 지역의 영향을 받고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으나, 그 논거는 충분히 제시되지 않 았 다. 같은 해 (1-25)은 한말 충북지방은 계몽단체 부진이 근대교육 부진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사 립학교 설립=구국교육 운동’이라는 도식적인 인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 장은 기존의 이론과는 크게 배치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같은 해 도립출연 기관인 충북학연 구 소(1-26)는 『충북학』 자료총서 제3집으로 영동 애국지사 이건섭 자료집을 간행하였다. 상소 문, 간찰 등을 토대로 발간한 해당 자료집은 1905년까지 그의 국권수호 활동이 담겨져 있다. 같은 해 장성수(1-27)는 척사유생의 기득권 유지와 국권회복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 려 는 움직임들은 제천 지역에서도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제천에서는 1889년 제천으로 이주해 온 화서학파 유생들과 기존의 재지사족층들이 결합해 강한 지배력을 행사해오고 있었다. 하지 만 이들은 농민 전쟁을 통해 점차 그들의 기반을 확장시켜 나가던 농민층과 충돌해 지역 내에 서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제천의 재지유림들은 1895년 의병전쟁을 계기 삼아 일제 에 적극 대응하는 한편, 지역 내에서는 다시금 기득권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저자의 결 론 이다. 기존 이론과 다소 벗어나는 것으로 다른 전공자들의 견해가 궁금하다. 같은 해 곽태성(1-28)은 19 08년에 출현한 기호흥학회( 畿湖興學會 )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 다. 기호흥학회는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운동의 지속적인 전개와 확산을 위해 지방에 支 會 를 설치하였다. 이 때 지회 차원에서 기호흥학회의 교육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지방관을 비롯 한 전현직 관료층, 지주 상인 등 자산가, 신학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유생층이었다. 청주지회 는 1908년 5월 10일 설립됐고 회원은 35명, 충주지회는 1908년 12월 19일에 생겨났고 회원 수는 가장 많은 103명이었다. 제천은 충북에서 가장 늦은 1909년 6월 19일에 설립됐고 회원 수는 33명이었다. 지역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역사정보로 후속 연구 성과가 기대되고 있다. 세명대학교 지역문화연구소의 연구성과가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의병의 고장답게 의병 성과물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근대기 연구가들을 고무시키기에 충 분 한 것이었다. 이창식(1-29)은 제천의병과 조선시대 향음례 문화가 연계된 지역축제를 주장하 였 다. 그는 자양영당 봄 가을 고유제와 아울러 향음례 행사는 유교적 문화유산으로 문화재적 가 치가 지대하다고 밝혔다. 나아가 향음례가 제천의병제에서 재현된다는 사실 자체가 제천의병 의 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의병연구사의 또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개인 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같은 해 전순동과 최동준(1-30)은 일제강점기 선교사와 문명퇴치 운동 등을 통해 충북지방 의 기독교 전래와 근대교육 의의를 고찰하였다. 류자명 평전(1-31)이 출간됐다. 저자는 중국 길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