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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884년부터 1895년까지 황학수가 거주하였던 곳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400-3 충청북도 영춘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 가옥 멸실 - 황학수( 黃學秀 , 1879.7.9~1953.3·12)의 호는 몽호( 夢呼 )이고 서울 화동에서 출생하였다고 하 는데, 「황학수 공적조서」에는 충북 제천사람이라고 하였다. 1884년 6세 때 어머니와 함께 이곳 으로 내려와 거주하였는데, 학행과 범절이 뛰어난 허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또한 그는 어머 니로부터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던 1895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이 주하였다. 1898년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육군참위( 參尉 )로 복무하였다. 1907년 8월 일 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고향인 제천으로 낙향하여 부명학교(후에 동명학교로 개칭)를 설립하고 인재육성에 전념하였다.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 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와 연관을 맺고 임시정부 국내조사원에 임 명되어 충북 제천지방의 조사를 담당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 되었다. 1920년 2월 군무부 비서국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의정원 군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 다가 동년 9월에 사임하였다. 그 후 북경( 北京 )으로 가서 신숙( 申肅)·신달모(申達模) 등과 통일 당(統一黨)을 조직하고 군사통일회( 軍事統一會 )를 개최하여 박용만( 朴容萬)·김천호(金天浩 )·강 구우(姜九禹 )·송호(宋虎 )·이장호(李章浩 )·남공선(南公善)·김갑(金甲 ) 등과 무력 항쟁을 주장하 면서 임시정부를 공박하기도 하였다. 1923년 3월에는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을 목표로 조직된 한국노병회( 韓國 勞 兵會)에 조 곤(趙坤 )·김정(金政) 등과 통상회원으로 입회하였다가, 1926년 3월에 특별회원이 되었다. 1924 년 7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되고 있던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기도 하 였다. 1927년에는 만주로 옮겨 가 신민부( 新民府)에 참여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등 간부들 이 일경에게 체포된 뒤 동년 7월 신민부가 재개편될 때, 그는 참모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중앙집 행위원장 김좌진(金佐鎭 )과 함께 항일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중국측과 교섭하여 신민부 관할 황학수 집터 임시정부 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