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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07년 11월 이강년 의병부대가 영춘면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던 곳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 산100-1 일대 충청북도 영춘군 군내면 상리, 동대리, 남천리, 백자리 산야 변형 -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조직된 일본수비대들이 각각 강원도 영월, 영춘면 의풍리 영춘면 오 사 리 오사진 쪽까지 이르렀다. 1907년 11월 이강년은 본진·별진·좌군의 300장병을 괴진( 槐津 )을 통해 급히 도강시키기 위하여 좌·우선봉장을 지휘하여 정예군 80명을 거느리고 동대리 밤 재 [栗 峙 ]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다시 일본 수비대원 18명이 영춘읍으로 향한다는 보고가 있었는 데, 당시 남쪽에서 접근하고 있던 일본군은 대구 쪽에서 북상한 일본군 제14연대였다. 중군장 김상태가 20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영춘면 백자리 잣골에 매복하고, 도선봉 백남규( 白南 奎)는 200여명을 인솔하고 남천리의 동네 어구에서 남으로부터 오는 일본군을 방비하였다. 좌 군장 이세영(李世榮)은 군사 600여 명을 거느리고 영춘면 상리의 남진과 북진을 지켜 서북쪽 에서 오는 일본군을 방비하였다. 이튿날인 11월26일 새벽에 이강년은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느릅재(유치, 楡峙 )쪽으로 출 동하였다. 잠시 후 10여 명의 적병들이 나타나 접전이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오른쪽 도창골(도창곡, 道昌谷 ) 상봉 쪽에서 아래로 사격을 가해 의병진이 무너졌다. 당시 이강년의 맏 아들 이승재(李承宰 )가 이강년을 보호하고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물어나서 맛대(영월 하 동 대야리)로 퇴각하여 머물렀는데, 따라온 군사가 겨우 수십 명이었다. 중군장 김상태가 남천 리에서 돌아와 남천 전투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종사 주범순( 朱範淳)·정겸동(鄭兼童)·심부름 하던 아이 만초( 萬初)와 포군 1명이 사망했으며, 백자동에서 교전할 때에 일본군 7명을 사살했 다고 하였다. 영춘면 일대 의병전투지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주요 전투지의 위치는 2008년 조사에 서 단양군향토사연구위원인 지성룡의 증언을 통해 확정하였다. 동대리 밤재는 수발에서 상리 읍내로 가는 고개인데,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 정상으로 가면 밤재임을 알 영춘면 일대 의병전투지 의병운동 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