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page

범바위학생만세시위계획지 541 C h u n g j u 충 주 조사의견 참고문헌 충주의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곳이나, 시위로 전개되지 못하였으므로 정확한 위 치 를 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편 유자명은 중국 망명 이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생가 터 위치를 알 수 있고 주변에 후손이 살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정비가 함께 필요할 것 같다. 「김종부 등 판결문」 「장양헌 공적조서」, 「장양헌 공훈록」 「유자명 공적조서」, 「유자명 공훈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3 삼일운동사(하) 유자명 (출처:공훈전자사료관) 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7년 2월 김규식(金奎植)·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 載煥 ) 등과 함께 남경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김규식을 선출하고 기관 지 『동방민족』을 발행하였으며, 비밀리에 각국에 비밀지부를 설치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는 등 운동범위를 확장하였다. 1936년에는 중국군과 합류하여 전시공작대로서 항일전에 참가하였 다. 이후 1942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약헌 개정 기초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43년 3월에 는 임시정부 학무부차장에 임명되었고,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서 항일투쟁을 계 속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기 위해 대만까지 왔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중국으로 돌아가 후난성 [ 湖南省 ] 창사[長沙 ]에서 농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자서전으로는 『한 혁명자의 회억록』을 남 겼다. 정부에서는 유자명의 공을 기려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유자명의 생가는 2008년 조사에서 충주시 대소원면 양평리 삼주리마을에 있었는데, 불이 나 서 집을 이동하고 옛 생가 터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생가 터는 밭으로 이용하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