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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9년 3월 10일 충주 간이농업학교 유자명과 교사 및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상의하였던 곳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 산10-2 일대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호암리 산야 원형보존 - 1919년 3월 10일경 충주 간이농업학교의 졸업기념 야유회가 범바위에서 열렸는데 이날 참 석했던 교사 유흥식(柳興植 , 유자명)과 학생 오언영( 吳彦泳)·장천석(張千石)·유석보(劉錫寶) 등 이 충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였다. 이때 농업학교 학생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의논하여 교회 측과 제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때 서울의 신학교에 재학하는 장양 헌(張良 憲)이 서울에서 일제에 대한 경고문을 가지고 와 비밀리에 교회 안에서 수백 매를 복사 하였으며, 이 경고문은 각처에 배포되었다. 그리고 교인들의 독립만세 시위 준비 장소는 탄금대 로 바뀌어 비밀리에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였다. 이후 김종 부( 金鍾富)는 장양헌(張良憲)·오언영(吳彦泳)·최명희(崔明熺) 등과 더불어 4월 8일 경 충주 공립보통학교 여교원 김연순( 金連順)에게 독립운동계획서를 보내어, 충주 장날 만세운 동에 동교 여학생들을 참가시키도록 하자는 권유문을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김종부 는 자기의 왼팔을 찔러 그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장양헌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을 고취 시키는 문장을 쓰도록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극기와 경고문·독립가( 獨立歌)와 일반 태극 기 10여 개를 우여곡절 끝에 김연순에게 전달하였으나 결국 거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 았다. 이로 인하여 유자명은 일제의 체포를 피하여 서울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최봉기 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 장양헌·오언영은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다. 이후 정부에서는 장 양헌에게 1997년 대통령표창, 최봉기에게 2002년 대통령표창, 오언영에게 2006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학생만세시위를 계획했던 범바위는 범바위오거리에서 직동길을 따라 남동쪽으로 약간 이동 하면 등산로 입구에 범바위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어 위치를 알 수 있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유자명은 상하이[ 上海]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의열단에 가입 범바위 학생만세시위 계획지 3·1운동 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