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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한 홍범식이 살던 곳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동부리 가옥 원형보존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 현충시설(홍범식 고택) 홍범식( 洪範植, 1871~1910)은 괴산 사람으로 자는 성방( 聖訪), 호는 일완( 一阮)이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 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 년에 태안군수로 의병보호에 힘썼다. 1909년 금산군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한일병합조약으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 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유서를 통해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 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 사람으 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고 당부하였다. 이후 정부에서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 洪命憙, 1888~1968)는 1919년 동지를 규합하여 장날인 3월 19일 만 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여 괴산 동부리의 집을 팔고 제월리로 이주하여 얼마동안 거주하였고 한다. 이후 홍명희는 1924년 『동아일보』에 서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었고, 이듬해 『시대일보』 편집국장 자리로 옮겨와 부사장과 사장을 역 임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가 결성될 때 부회장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 신간회 주최 제 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홍명희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 으로 『조선일보』에 10여 년에 걸쳐 연재된 당대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인 『임꺽정』의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월북했다. 홍범식 고택은 「홍명희 판결문」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1730년경 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가이다. 건물은 홍범식 고택 계몽운동 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