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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46 이들은 2월 14일 학생이란 신분이 감안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53) 한편 청주 사범학교는 연합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2월 7일 동교 상년생인 전 모 학생이 돌연 퇴학 처분을 당한 것은 주목된다. 그가 퇴학처분을 당한 까닭은 1월 23일 고향인 상주군 외서면 예 의리에 거주하는 동창생(농잠학교 재학)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54) 그 내용은 당시 전국 및 청주에서 전개된 학생운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비 록 청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직접 연합시위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동향을 알려주는 것 으 로 생각된다. 광주학생운 동의 여파로 청주에서 전개된 3개교 의 연합시위는 곧 인근지역으 로 파 급되었 다. 즉, 괴산에서 槐山公普生 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 움직임이 있었다. 1930년 1월 27 일 아침, 괴산경찰서는 돌연 괴산공보 학생 1명과 청년 2명을 검속하고 이들이 지니고 있던 격 문 백여 매를 압수하였다. 이들은 괴산 장날 여러 명의 장꾼 등에게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설명 하고 괴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발각된 것이었다. 155) 괴산경찰서는 괴산 공보 학생들의 시위계획을 탐지하고 10여명의 경관이 괴산공보를 포위한 가운데 등교하는 학 생들의 몸을 일일이 수색하였다. 이때 5학년생 趙泰瑢 이 지니고 있던 붉은 잉크로 쓴 격문 백 여 매를 발견하고, 그를 체포하고 격문을 압수하였던 것이다. 일경은 27일과 28일에 걸쳐 趙泰 瑢 · 申昌範 · 權漢星 ·林賢相 · 慶箕東 · 申鉉斌 · 慶正福 등 7 명의 학생과 청년을 검속하였다. 156) 이들 중 慶箕東 등 4인은 석방되었으나, 權漢星 등 3인은 괴산경찰서장의 즉결처분으로 구류처분을 당하였다. 157) 한편 괴산의 靑川公普 학생들은 1월 26일이 청천장날임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장터에서 격문 50여 매를 살포하다가,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경에게 45명이 피체되어 괴산경찰 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당하였다. 158) 이 같은 괴산의 槐山公普 와 靑川公普 학생들의 만세시위 움직임은 광주학생운동과 청주학생 운동의 연합시위에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괴산공보 학생과 청년들이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점은 주목된다. 괴산공보는 이미 3·1운동이나 1920년대 맹휴투쟁의 경 험을 통해 이 지역 민족운동의 전위가 되었었다. 또한 괴산에는 1920년 8월 괴산청년회가 조직 되었고, 괴산청년동맹으로 발전되었다. 청년 회원들은 신간회 괴산지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괴산 기자동맹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7년 8월 17일에 개최 된 괴산청년회 혁신총회에서 결의된 3대 강령은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159) 따라서 당 153 《東亞日報》, 1930년 2월 17일자. 154 《東亞日報》, 1930년 2월 11일자. 155 《朝鮮日報》, 1930년 1월 29일자. 156 《朝鮮日報》, 1930년 1월 31일자. 157 《東亞日報》, 1930년 2월 2일자. 158 《朝鮮日報》, 1930년 1월 28일자, 《東亞日報》, 1930년 1월 28일 및 1월 30일자. 159 강신욱, 2001, 「1920년대 청년운동」, 『증평·괴산 근·현대사』, 푸른 나라, 146~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