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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괴산공보학생들이 1930년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만세운동을 계획한 곳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667-15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건물 멸실 - 1919년 3월 19일 괴산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괴산공립보통학교의 4학년 급장이었던 곽용순(郭容淳 )은 35명의 학우들과 함께 학교를 뛰쳐나와 시위군중 대열에 합류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전단을 배포하여 경찰서 쪽으로 행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당하였다. 1925년 10월에는 민족차별의 모욕적 언사를 함부로 내뱉는 일본인 교장을 각성시키기 위한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일본인 교장 아도(兒島 )는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조선인은 식충이 며, 야만인이다. 조선은 약하고 일본은 강하다.”라는 등 상습적으로 민족차별의 말을 하였다. 이 에 학부형들은 제3회 정기총회에서 이런 교장에게 자식들을 교육받게 할 수 없다며 일본인 교 장을 몰아내는 운동을 결의하였다. 이는 민족차별 교육이나 모욕에서 촉발되는 1920년대 학생 투쟁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30년 1월 27일 아침, 괴산경찰서 경찰들이 갑자기 괴산보통학교 학생 1명, 청년 2명을 검문 하고 이들이 지니고 있던 격문 백여 매를 압수하였다. 이들은 괴산 장날 여러 명의 장꾼들에게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괴산경찰서 는 괴산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계획을 탐지하고 10여 명의 경관이 학교를 포위한 가운데 등교 하는 학생들의 소지품을 일일이 수색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5학년생 조태용이 가지고 있던 격문 100여 매를 발견하고, 그를 체포하였다. 경찰은 그 다음날까지 시내 각처에서 경계활동을 펼쳐 청천공보 학생들을 포함 10여 명의 학생들을 검거하였다. 괴산공립보통학교의 위치는 2008년 조사에서 이 지역 향토사학자인 김근수와 이춘택의 증 언을 통해 확정할 수 있었다. 현재 이곳은 괴산농협 등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으로 도로가 개설 되었다. 괴산공립보통학교 터 동맹휴학지 학생운동 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