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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20년 8월 5일 괴산청년회 창립총회가 열렸던 곳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189-1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건물 멸실 - 괴산청년회는 1920년 8월 5일 유문규 등 10여 명의 청년이 발기하여 괴산 읍내 예수교회당 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 결성되었다. 회장 유홍규, 총무 김영규 등이 선임되었는데, 당시 회 원수는 300여 명에 달했으며 민족교육을 목표로 ‘보성의숙’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이와 함께 문맹 퇴치를 위해 노동야학과 여자야학을 개설했으며, 풍속 개량과 미신타파를 위해 연극 공 연 및 순회강연을 하였다. 이와 함께 금주·금연 운동을 펼치는 한편 이재민 구호와 도난예방 활 동 등 함께 살아가는 지역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괴산청년회의 온건노선에 의한 활동 은 1927년에 들 어서면서 변화요구 에 직면하게 되었 다. 1927년 7월 6일에는 창립기념식 도중 경찰들이 들이닥쳐 깃발과 예산안을 압수한 사건이 발 생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27년 8월 21일 혁신총회를 통해 기존의 ‘회장제’에서 ‘집해위원 제’ 로 조직운영체제를 전환하고, 회원가입 연령을 만 30세로 제한하여 장년층을 배제하게 되었 다. 이후부터 괴산청년회는 신간회 괴산지부 설립에 참여하는 한편, 괴산기자동맹과 괴산소년회 를 조직하는 등 괴산지역의 각 부문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 의 청년단체들이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는데, 괴산청년회도 사회주의 사상이 깊이 침투한 것 으 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불온문서가 있다는 혐의를 받아 괴산청년 회 가 운영하던 보성의숙, 동아일보 괴산지국을 수색당하기도 했다. 괴산청년회는 1928년 2월 16일 집행위원회를 열어 해체를 선언하면서, 모든 사무를 괴산청 년 동맹으로 넘기고, 회원 전원이 괴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또한 괴산청년회원이 주축이 되 어 괴산청년동맹설립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를 통해 괴산청년회가 괴산청년동맹으로 변화한 것 을 알 수 있다. 괴산청년회는 『동아일보』에 읍내 예배당에서 창립하였다고 하였다. 2008년 조사에서 괴산 에 서 가장 오래된 괴산제일교회에 문의한 결과, 괴산청년회 창립총회가 있었다는 사실과 교회 이 괴산청년회 창립대회지 국내항일운동 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