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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42 찾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강서면 신대리에 집결하여 있었는데, 학교 당국자가 현장으로 달 려 오자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133) 高山 교장은 학생들이 등교한다면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 겠다고 학부형 대표에게 약속하였다. 이 약속을 믿고 학생들은 맹휴투쟁 5일 만인 9월 27일, 전원이 등교하였다. 학생과 교장은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선에서 맹휴는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高山 교장은 약속을 어기고 학생 1명은 퇴학, 2명은 5일 정학, 3명은 3일 정학에 처하였 다. 학부모들은 교장의 식언에 크게 분개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134) 이 역시 간교한 학생운 동 탄압의 사례이다.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맹휴에 이어 이해 12월 5일에는 청주고보 학생들이 맹휴투쟁을 전개 하였다. 청주고보의 일본인 교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인은 야만성이 있다”라거나 “야만 인종이었다”는 등의 민족 차별적 발언을 하여 학생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새로 부임한 朱敎諭 는 이 같은 교장의 만행을 견디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게다가 일본인 敎諭 인 關本 이 《文敎 の 朝鮮 》 9월호에 한국인을 모욕하는 글을 게재하자 학생들의 감정은 크게 격앙되었다 드디어 12월 5일 2학년생 전원이 5개조로 된 진정서를 도 학무국과 학교에 제출하고 맹휴를 단행하였다. 이어 7일에는 3학년생 전원이, 9일에는 1학년생 전원이 맹휴에 동참하였다. 135) 이 에 대하여 학교 당국은 매우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학교 당국은 12월 20일 학부모와 2,3학 년 생 130여명을 학교로 나오게 한 후 퇴학 7명을 포함하여 66명에 대한 중징계 처벌내용을 통 지하였다. 이로써 淸州高普 의 맹휴투쟁은 더 이상 진전 없이 이튿날부터 학생들이 등교함으로 써 17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136) 충북지역 학생들의 맹휴투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28년 3월 10일에는 丹陽公普 5, 6학 년 학생 80여명이 일본인 高橋와 安某 교사를 배척하기 위하여 맹휴를 단행하였다. 이 때 인근 지역의 永春公普 와 梅浦公普에서도 맹휴설이 있었다. 137) 1929년 5월 29일에는 延豊公普 학생들이 맹휴투쟁을 벌였다. 즉, 5월 28일 연풍공보의 교장 인 武野弘法이 자신이 담임을 맡은 3, 4학년 복식 수업시간 때 해군기념일을 질문하였으나 학 생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학생 전원을 주먹으로 머리를 가격하고, 너희 같은 아이들은 가르칠 수 없으니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폭언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3~6학년생 전원이 맹휴를 단행하였다. 또한 평소 교장의 근신하지 않음에 불만을 품어 왔던 학생들은 도 학무국에 교장의 비행을 고발하는 6개조의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① 출퇴 근 시간이 일정치 않고 수업시간임에도 자신이 볼 일이 있으면 수업을 하지 않아 시간을 낭비하 게 하는 일, ② 매월 5전씩 운동비를 걷으면서도 운동기구가 파손되면 다시 대가를 물리는 일, ③ 수업료 독촉이 심하여 기일이 지난 학생은 내쫓는 일, ④ 1927년에 학생들이 4, 5개씩 제작 133 《東亞日報》, 1927년 9월 26일자. 134 《東亞日報》, 1927년 10월 2일자. 135 《朝鮮日報》, 1927년 12월 7일, 12월 9일 및 《東亞日報》, 1927년 12월 12일자. 136 《朝鮮日報》, 1927년 12월 23일자. 137 《朝鮮日報》, 1928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