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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9년 3월 19일에 괴산군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201-1 ~ 동부리 194-3 일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시장 변형 - 3월 15일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던 홍명희는 동부리의 자택으로 귀가한 후 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7일~18일경 홍명희는 자택에서 이재성, 홍용식과 선언서 300매를 제작하고 3월 19일 괴산장날에 군중에게 배포하여 만세운동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3월 19일 괴산장터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홍명희를 비롯한 주도자들은 학생 수십명 을 이끌고 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 경찰이 긴급 출동 하 여 홍명희·이재성·홍용식 등 18명을 체포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압수하였다. 다 음 장날인 3월 24일에는 홍명희의 동생인 홍 성희( 洪性熹)의 주도하에 만세시위가 일어났 다. 그는 괴산면 서기인 구창회( 具昌會), 소수면 서기인 김인수(金 仁洙)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 하였으나, 일제 경찰은 주모자 등을 검거하고 이들을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 은 경찰서, 우편국, 군청 등을 공격하였으나, 경찰과 충주수비병에 의해 진압되어 오후 11시경 해산되었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에 약 2,000여명,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에는 7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세시위는 다음 장날인 3월 29일에도 계속되었다. 이날 장날에도 많은 군중이 집결하므로 경찰들은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오후 6시경 약 1,5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자 경찰들은 이 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 군중들도 이에 항거하여 순사, 순사보에게 부상을 입혔고 민가의 유 리창 2장을 파손시켰다. 군중들은 오후 8시 30분 경 해산하였다. 4월 1일에는 다시 1,000여 명의 시위군중들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 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괴산장터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9일 시작하여 보름에 걸쳐 많은 군중들이 참여하 였고, 충북지역의 본격적인 만세시위 시발점이 된 장소로 중요성이 매우 크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서 보면 괴산읍의 서쪽에 군청, 남 쪽에 경찰서가 위치하였고 , 동 쪽에는 괴산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3·1운동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