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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37 있으나, 대부분의 젊은 농민층인 3·1운동 주도자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고향에 거주하며 이 후 전개된 청년운동, 신간회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3)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 이 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에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실력양성운동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 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기조는 한국인의 우민화였다. 따라서 실업교육은 장려할지언정 고 등 교육의 기회는 근본적으로 박탈하여 대학을 설립하지 않았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일제에 의한 정치·경제적 예속을 당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 ‘ 學의 獨立 ’을 통해 궁극적으로 일제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식하에 추진된 것이었 다. 104) 따라서 ‘민중문화의 선구’, ‘최초의 가장 큰 민중운동’, ‘우리 민족의 생명운동이요 문화운 동’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05) 이 운동은 1922년 말 조직된 민립대학기성회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듬해 3월에 열린 기성회 창립총회에는 전국에서 참여한 1,170명의 발기인이 참여하였고, 여 기에서 중앙부 임원을 선정하였다. 한편 1923년 5월 10일,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경성부 발기를 시작으로 각 지역에 230여개의 지역부가 조직되었다. 충북지역에서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군민대회·면민대회·유지대회 등을 개최하여 기금을 갹출하고 지역부를 조직하였다. 1923년 1월 초에 영동·괴산 등지에서 청 년회와 유지 제씨를 중심으로 4, 5명의 발기인을 선정하여 중앙의 기성회에 통보한 이래 이후 10월까지 충북의 청주·보은·음성·충주·진천·제천 등지에서 발기인 선정대회가 열렸고 지역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간교한 책동이 있자 이 운동은 쉽게 와해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청주지역부의 조직에 참여한 인물의 성향도 민립대학운동의 성격을 알려주는 좋 은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청주지역부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물 중 閔泳殷 과 廉宣赫 은 전술한 바와 같이 3·1운동 때 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의 사주에 의해 조직된 청주자 제 회의 발기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일제와 융화를 외친 인물이 참여하였 다 는 사실은 민립대학운동이 성공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해석된다. 106) 104 《東亞日報》, 1922년 2월 3일자. 105 《東亞日報》, 1923년 2월 23일자. 한편 《朝鮮日報》도 사설을 통해 ‘사람으로서의 가치 표명’을 위해 민립대학을 설립 해야 한다고 하며, 일본이 강성하게 된 이유를 慶應大學·早稻田大學 등의 존재에서 찾고 있다(1922년 12월 1일 및 동월 2일자). 106 盧榮澤, 1990, 「民立大學 設立運動 硏究」, 『國史館論叢』 제11집, 88~94쪽. 여기에서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실패한 원인 을 ① 지도자와 간부들의 실천력 부족, ② 운동의 주체와 추진과정에 대한 불신, ③ 한국인의 경제적 빈곤, ④ 지나치게 외형 적 조직에만 치중하고 구체적 계획과 실천방안이 마련되지 못함, ⑤ 많은 면장과 군수들의 참여, ⑥ 일제의 탄압과 방해, ⑦ 천재로 인한 헌금 부진, ⑧ 언론기관의 민족의식과 공공정신의 부족 등으로 지적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다 청주자제회의 경 우처럼 참여자의 부일적 성향도 실패의 중대한 요인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