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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35 내재적 전개를 실증하고 있다. 4월 2일 진천 광혜원 시위를 주도한 尹炳漢은 구한국 육군 참위 출신으로 군대 강제해산 이후 의병항쟁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하여 구장으로서 만세운동을 주도 한 인물이다. 88) 또한 4월 3일 영동 학산 서산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梁鳳植 은 이강년 휘하에 서 활동한 의병 출신이며, 89) 4월 1일과 2일 청원 내수 세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한봉수는 대표적인 후기 의병장 출신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90) 이들 은 독립운 동의 내재적 계승과 맥락을 실증하는 구체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시위방법으로 봉화만세운동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봉화만세운 동은 50여 일간 충청지역 18개 군에서 계속된 것인데, 91) 충북에서 이 방법을 최초로 창안한 것은 청주 강내면 태성리에 거주하던 趙東植 이었다. 그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봉화를 올려 서로 알리는 ‘ 烽火告變’의 전통을 참작하여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봉화만세운동을 주도 하였다. 92) 이곳에서 시작된 봉화만세운동은 즉시 유행하여 4월 초에는 면내와 옥산, 남일을 비 롯한 인근 지역은 물론 멀리 충남과 강원까지 파급되었다. 93) 봉화만세운동은 온건한 충북 지역 민의 기질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이 운동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호당 1, 2명이 의무적으 로 참가하였으며 “산에 만세 하러 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94) 여섯째, 충북은 이른바 민족대표의 산실로서 의의도 크다는 점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孫秉 熙 · 權東鎭 · 申錫九 · 申洪植 · 權秉悳 · 鄭春洙 등 6인이 충 북 출신이다. 현재 학계에서 민족대표의 대표성과, 3·1운동에서의 역할에 대해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이 계몽주의 자로서 한계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충북 출신 민족대표들은 법정에서도 당당한 독립논 리를 펴며 투쟁하였다. 물론 鄭春洙 의 경우처럼 자치론을 펴고 스스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를 자원하는 등 민족대표로서 3·1운동의 이념을 왜곡하고 후에 변절한 인물에 대해서는 엄정한 민족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일곱째,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배격하고 타격을 가하였다는 점이다. 충북 지역민은 일제가 현 실을 고려하지 않고 강제적 산업정책을 강요하는데 강한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한 불만 이 표출된 구체적인 사례는 4월 3일 양봉식 등이 주도하여 전개한 영동 학산 서산 시위였다. 이 날 3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은 양봉식의 지휘 아래 면사무소에 심어 놓은 桑苗 2만 8천 그루 와 松苗 1만 그루 등 3만 8천 그루의 묘목을 뽑아내 불태워 버렸다. 양봉식은 좁쌀 살 돈도 없 고 묘목을 심을 땅도 없는 주민들에게 비싼 묘목을 강매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군민 8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087~1089쪽의 「尹炳漢 등 判決文」 및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 립운 동사』 제3권, 68쪽. 8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123~1126쪽의 「梁鳳植 判決文」. 90 朴杰淳, 1996, 「義兵將 韓鳳洙의 抗日鬪爭」, 『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267~285쪽. 91 金鎭鳳, 1987, 「湖西地方 3·1運動의 性格」, 『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46~148쪽. 9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102~1103쪽의 「趙東植 判決文」. 9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533쪽. 9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4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