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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34 ③ 충북지역 3·1운동의 성격 충북지역의 3·1운동은 발발 시점이나 시위 규모, 전개 양태 등에 있어 다른 지역보다 빠르 다 거나 대규모라고 평가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 특징과 의의가 결코 작다고 할 수만은 없 다. 충북지역 3·1운동의 특징과 의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적으로 후발적이나 지구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만세운동의 발발은 3월 19 일의 괴산 시위로 본격화하여 전국에서 가장 늦은 출발을 보이나, 4월 19일의 제천 송학 시 위 까지 1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 절정기는 4월 초순이었는데, 특히 2일에는 청주·진 천· 괴산·음성·옥천·영동 등 거의 도내 전역에서 만세 함성이 메아리쳤다. 진천에서는 하루에 3 개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이날 청주 인근의 산봉우리에는 동시에 봉화가 올랐으며, 괴 산 에서는 3회 연속하여 장날에 만세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둘째, 공간적으로 도내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충북은 10개 군 이었는데 한 군데도 빠짐없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한일관계사료집』과 『한국독립운동지 혈 사』 등 우리 측 자료에 보은과 단양이, 일제 측 자료에 단양이 기록에서 누락되었으나, 이는 전 문이나 보고 상의 착오에 의한 것일 뿐이다. 특히 괴산읍·괴산 청안·영동 서산·진천 광혜원 ·옥 천 청산·음성 장호원 등지는 한 곳에서 2회 이상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특히 청안에서는 3 월 30일 하루에 3차에 걸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셋째, 시위 양태가 격렬하였다는 점이다. 일제의 『조선소요사건경과개람표』에 의하면 충청 지 역에서 전개된 92회의 만세시위 중 55%인 51회가 폭력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 국 평균치 37%를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운동 양상의 격렬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실제 충북 의 경우 시위 군중들은 경찰관서 13, 헌병대 5, 군청과 면사무소 7, 우편소 1개소 등 26개소를 습 격·파괴·방화하였다. 이처럼 시위양상이 격렬하였기 때문에 평안·경기지역 다음으로 많은 희 생 자가 발생하였다. 85)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된 것은 군중이 피체된 동지를 석방시키기 위해 헌병 과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하는 과정에서 일제와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제는 군중 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현장에서 주도자를 연행하지 않고 얼굴만 확인해 두었다가 나중에 체 포하거나, 변장한 헌병과 경찰을 시위 군중에 혼입시킨 다음 색연필로 주도자의 옷에 표시를 하 게 하였다가 나중에 연행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86) 충북지역 만세시위의 격렬성은 위 기의식을 느낀 일본인이 경비 무력이 있는 소재지로 피난하거나 아예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자 까지 있었다는 조선헌병대사령부 보고를 통해 그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87) 넷째, 독립운동의 내재적 계승과 맥락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3·1운동은 한말 의 국권회복운동과 1910년대의 비밀결사투쟁을 계승한 것인데, 특히 충북지역은 구한국 군인 이 나 의병장 출신이 3·1운동을 주도하고 있어 의병으로부터 3·1운동으로 연계되는 독립운동 의 8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930~931쪽. 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634쪽. 8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7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