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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07년 8월 18일에는 무극시장 6백여 명의 의병이 집결한 곳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78-19 일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면 무극리 시장 변형 - 1907년 고종의 폐위와 일제의 강제 군대해산은 충북지역의 의병 봉기를 촉발하였다. 음성에 서도 이와 관련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8월 18일 음성군 무극시장에 6백여 명의 의병이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충주에서 보조원과 일본인을 죽인 의병으로서 규율을 점차 갖추고 세 력 이 강성해졌다. 이들의 주력은 원주진위대 해산병이었다. 이들은 무극을 습격하고 진천에서 3 리 거리 떨어진 맹동면 島谷 에 3백여 명의 무리가 부근 마을로부터 총과 병사를 모으고 진천 습격 을 준비하였다. 진천분파소의 급보를 받은 일제는 하사 척후를 진천에 급파하여 의병을 방비하 도록 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당시 음성 일원의 의병 상황을 잘 알 수 있는데, 대대장 부파(不 破) 소좌의 보고(8월 22일)에 의하면 의병의 한 무리가 무극시장 부근으로부터 장호원 사이에 산재한다고 하였다. 한편 9월 17일에는 이궁소대( 二宮小隊)를 음성 방면으로 파견하였는데, 18 일 무극장(無極場 ) 부근에 폭도 집합이라는 정보를 얻어 19일 무극장( 無極場 )을 향하여 전진 중 사정리(沙亭里)에서 약 200의 의병과 조우하여 교전을 벌여 이들을 무극장 방향으로 후퇴 시키고 20일 충주로 귀환하였다. 이밖에도 같은 해인 1907년 10월 9일에는 무극장 부근에 출 동한 충주경찰서 순검이 의병에게 처단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디지털음성문화대전」에 따르면 무극장은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와 1872년(고종 9) 에 편찬된 「충주목지도」 등에 기록되어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위치는 본래 금왕읍 무극1 리 장터거리에서 열렸으나 1930년대부터 금왕읍 무극리 무극교 부근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1918년에 제작한 일제강점기 지형도에서도 무극장터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본래 장터 가 위치했던 무극1리는 무극초등학교 서쪽 일대로 다수의 건물이 들어선 상태이고, 무극시장은 무극1리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한편 무극시장은 시장 현대화사업으로 시설이 정비되었다. 무극장터 일대 의병활동지 의병운동 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