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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30 위가 전개되었는데, 일제의 야만적 탄압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50) 괴산은 도내 만세운동 진 원지이자 최다 인원인 6천여 명이 참가한 지역이다. ㉡ 옥천군 3월 27일 옥천 이원장터에는 6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이원경찰주재소로 쇄도하여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고 주재소 안으로 돌입하여 유치장과 벽을 파괴하는 등 격 렬히 항쟁하였다. 이 때 옥천헌병분대장 등이 응원 출동하였으나, 오히려 10명의 헌병이 부상 할 정도로 시위 군중의 기세가 등등하자 일제는 다시 장교 이하 21명을 파견, 사격을 감행하여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51)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이원 시위를 충북지역에서 ‘폭행 시위의 효시’라고 보고하였다. 52) 4월 2일과 3일에는 청산에서 만세함성이 울려 퍼졌다. 2일 밤에 3백여 명이 전개한 시위는 곧 해산되었으나, 이튿날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청산 헌병주재소를 내습하였는데 위기를 느 낀 일제가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여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53) 4월 8일 밤에는 군서면 오동 헌병주재소 관내에서 약 50여 명의 주민이 독립만세를 고창하 였 으나 헌병이 출동하자 곧 해산하였다. 54) ㉢ 영동군 3월 30일 학산면 鋤山 경찰관 주재소에 2백여 명의 주민들이 돌을 던지고 안으로 들이닥쳐 유리창과 전화를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나, 7명의 경찰관이 응원 출동하여 군중을 해 산시켰다. 55) 서산리에서는 다시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300여명의 군중이 경찰주재소와 면사 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며 시위를 벌이자 일제가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10명의 사상 자가 발생하였다. 56) 4월 2일부터 4일에 걸쳐 매곡면 노천리와 옥전리 일대에서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시위군 중 은 인근의 추풍령 헌병대로 몰려가 전후 7회의 시위를 벌였다. 57) 4월 5일 매곡면 추풍령 헌병 분견소 숙사가 불탔는데, 일제는 이를 ‘폭민’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보고하였고, 6일 오전 11시 50 朴杰淳, 1996, 『槐山地方 抗日獨立運動史』, 괴산문화원, 113~114쪽. 51 高第九一四六號, 1919. 3. 28,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二十九報)」(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431~433쪽). 5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제6권, 533쪽. 53 高第九八三三號, 1919. 4. 4,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三十七報)」(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505쪽) 및 朝鮮 憲兵 隊司令官 發信 電報, 1919. 4. 6(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515쪽). 54 高第一一○一四號, 1919. 4. 11,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四十四報)」(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593~594쪽 ). 55 高第九六一三號, 1919. 3. 31,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三十二報)」(金正明編, 1967, 『朝鮮獨立運動』第Ⅰ卷, 原書房, 441 쪽). 56 朝鮮憲兵隊司令官 發信 電報, 1919. 4. 6(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第Ⅰ卷, 515쪽). 5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120~1122쪽의 「林奉春 등 判決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