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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9년 4월 3일 광혜원에서 약 600명의 군중이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인 곳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광혜원리 289 일대 충청북도 진천군 만죽면 광혜원리 시장 변형 - 1919년 4월 2일 윤병한( 尹炳漢)은 정관옥(鄭寬玉)·오은영(吳殷泳 ) 등과 함께 광혜원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윤병한은 김동화(金東華)에게 밤 8시경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는 취지의 경고문을 작성하게 하고, 면사무소 소사인 박수문( 朴壽文)을 시켜 약 20매를 인쇄하고 이날 밤 장터에서 배포하였다. 4월 2일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4월 3일은 장날이므로 군중들이 대규모로 운집할 것으로 예상한 광혜원헌병주재소 헌병들도 경계를 강화했다. 4월 3일은 광혜원의 장날로 장터에 모인 600여 명(일부 기록에는 1,000명이라고 함)이 시위 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 과정에서 시장의 민가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일본 헌병분견소장 입강 (入江)이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진천읍내로 연락하였고, 이에 출동한 헌병 10여 명은 시 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군경 보고자료에 따르면 이때 사망자는 3~4명, 부 상자는 5~7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4일부터 진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만세운동 주동자 수십 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로써 만세시위에 앞장선 윤병한은 징역 3년, 정운화·백선옥·이영호·남계 홍·신달용은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윤병한은 애 족장, 남계홍과 이영호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만세시위가 있었던 광혜원장은 현재까지도 장이 서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지형도에서도 지금 의 장터 위치를 시장으로 표시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현재 광혜원장은 광혜원삼거리와 만승 교사거리의 서쪽으로 들어서는데, 개발로 인해 다수의 상가가 들어서고 도로가 개설되어 예전 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광혜원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3·1운동 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