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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28 월일 지명 군중수 출동병력 발포개소 사상자 계획 진행의 정도 4. 3 영동 서산 (2) 300 5(1) 1 10 4. 4 영동 2,000 14 4. 4 음성 장호원 2,000 4. 5 장호원(2) 3,000 1 4. 6 영동 추풍령 300 4. 6 청주 문의 1,300 8(1) 4. 6 음성 음성 500 4. 8 보은 보은 100 4(1) 4. 8 옥천 오동 50 4. 10 괴산 광덕 300 1(1) 1 4. 11 보은 구인리 100 4. 12 보은 무서리 100 4. 13 보은 선곡리 50 4. 17 제천읍 1,000 15(1) 1 3 4. 19 제천 송학 50 ※ 괄호 내 숫자 : 지명(발생횟수), 출동병력(출동개소), 사상자(일본측 사상자) 이로써 보면 3·1운동 당시 충북지역에서는 3월 19일의 괴산시위를 필두로 4월 19일의 제천 송학 시위까지 만 1개월 동안 도내 전역에서 38회의 시위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시위참 여 군중 수는 인원이 누락된 괴산(3. 19)과, ‘다수’라고만 기록된 진천 석현(4. 2)을 제외하더라 도 24,750명에 이르는데, 이는 우리는 물론 일제측 통계와도 근사치이다. 그런데 이 자료는 당일의 기록으로서 매우 정확하고 상세한 듯 보이나, 누락된 사실이 적지 않 다. 당시 충북은 10개 군이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한일관계사료집』과 『한국독립운동지 혈 사』 등 우리 측 자료에는 보은과 단양의 만세운동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측 자료에는 보 은군내 시위가 4회나 기록되어 있다. 단양의 경우도 회고담이나 관련 자료에 의하면 군내 각 지 에서 4, 5차에 걸쳐 소규모의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41) 따라서 충북은 10개 군 전체 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측 자료는 물론 일제 측 자료에서도 소규모 인원이 모여 단순히 만세를 외치고 해산한 경우나, 일제 군경이 출동하지 않고 시위 후 자진 해산한 경우, 경찰이나 헌병주재소와 멀리 떨 어져 일제가 뒤늦게 파악한 경우 등은 당일의 통계에서 제외되었다. 예컨대 4월 1일과 2일에 걸 쳐 청원군 내수읍 세교리 구 장터에서 의병장 출신 한봉수가 주도한 만세시위나, 42) 4월 1일 밤 4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제3권, 77~78쪽. 42 朴杰淳, 1996, 「義兵將 韓鳳洙의 抗日鬪爭」, 『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286~2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