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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27 3월 15일에는 진천에서 보통학교 생도들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역시 불발로 그쳤다. 37) 충북에서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3월 19일 괴산읍 장터에서 홍명희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 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늦은 출발이었다. 이처럼 충북지역의 만세시위가 늦게 시작된 까닭은 교 통 의 불편, 종교조직의 미약, 학생층 등 독립운동 주체 세력 역량의 미성숙 등이 요인이 되었던 것 으로 보인다. 38) 그러나 이후 충북지역에서는 4월 19일 제천 송학 시위까지 만 1개월간 도내 각 곳에서 만세함성과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당시 조선군참모부의 비밀문서는 충청지역을 경기지 역 다음의 위험지역으로 간주할 정도로 시위는 격렬히 전개되었다. 39) 日次 보고 등 일제 측 자료를 중심으로 충북지역 3·1운동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일제측자료에나타난충북의3·1운동> 40) 월일 지명 군중수 출동병력 발포개소 사상자 계획 진행의 정도 3. 2 청주 선언서배포 3. 11 청주 불온 행동이 나타날 조짐이 있음 3. 15 진천 보통학교 생도 독립운동을 기도 3. 19 괴산 12(1) 3. 27 이원 700 1 2(10) 3. 29 괴산(2) 1,500 15(1) (1) 3. 29 영동 서산 200 3. 30 미원 1,000 7(1) 1 4 3. 30 청안(3) 3,000 7(1) 7 4. 1 괴산 청천 500 10(1) 4. 1 음성 한천 200 4. 2 진천 석현 다수 1 2 4. 2 진천 장양 200 1 4. 2 진천 광혜원 500 4. 2 음성 천평 500 4. 2 괴산 장연 200 4. 2 청주 500 4. 3 영동 괴목 2,000 4. 3 광혜원(2) 600 6(1) 1 9 4. 3 옥천 청산 1,000 1 5 37 朝鮮總督府, 1919. 5. 10, 「騷擾事件報告臨時報第十二」(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第Ⅰ卷, 712쪽). 38 朴杰淳, 2000, 「忠北地方 獨立運動史 硏究現況과 課題」, 『한국독립운동사연구』15, 363~364쪽. 39 朝特報九號, 1919. 4. 7, 「騷擾事件に關する狀況」(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第Ⅰ卷, 524쪽). 40 이 표는 金正明編, 1967, 『朝鮮獨立運動』第Ⅰ卷, 原書房에 수록된 일제의 각종 정보 자료를 종합하여 작성한 것이다.